매일신문

한국경제수탈 총본산 동양척식회사 만행

[國恥百年] ⑦빼앗기고 빼앗기는 땅

'살을 뜯어먹고 뼈를 갈아먹는 그 무엇이 있다하면 동척 이상이 어디 또 있으랴. (중략) 아! 조선인의 악귀인 동척아! 어쩌면 이다지도 혹독하냐? 조선의 토지는 얼마나 가졌느냐. 조선인의 생명은 얼마나 빼앗았냐?' 잡지 개벽의 1925년 3월호에 실린 글이다. 동양척식주식회사의 폐해에 대해 울분을 토한 것이다.

일제는 러일전쟁의 승리로 한반도에서 정치적·군사적 우위를 확보했다. 이에 따라 농업회사나 조합 등을 통해 한국에서의 농업경영에 적극 참여했다. 일본정부도 내부의 식량, 인구문제로 농업이민을 적극 장려하였다. 이를 동양척식주식회사를 통해 구체화했다. 1908년 8월 동양척식주식회사법을 만들었다. 회사 설립 목적은 한국에서의 척식사업 영위로 돼있다. 농업이민을 통해 식민지 농업수탈의 기반을 조성하겠다는 것이다. 동척의 토지소유는 1910년 1만1천35정보였으나 1914년 7만144정보, 1919년 7만8천520정보로 늘어났다.

동척의 만행은 전남 나주군 궁삼면에서 일어난 '이회춘 사건'이 단적으로 보여준다. 동척은 궁삼면에 일본인 이민을 위해 무작정 이민배당지를 선정하고 강제로 토지분할 표목을 박았다. 이회춘의 어머니가 "이 논은 우리 소유인데 표목을 박는 이유는 무엇이냐"며 표목을 뽑았다. 이를 본 일본군 헌병은 군화로 그녀의 흉부를 찼고, 그녀는 자기 땅인 논두렁에서 즉사했다. 또 황해도 재령군 북률면 여물평 동척농장의 소작쟁의를 비롯한 당시 대부분 소작쟁의가 동척 소유지에서 발생한 것을 감안하면 조선에서 동척이 얼마나 잔악한 행위를 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동척의 한국토지와 농업을 수탈한데 대한 반감은 당시 신문이나 잡지의 단골 기사거리였다. 이에 일제는 동척을 비방하는 기사를 어김없이 압수하여 게재하지 못하게 하였다. 1924년 11월 12일자 조선일보는 '재차 동척에 대하여'라는 제목으로 사설을 게재했으나 압수당했다. 이에 따르면 '동척이여! 기름을 엎지르고 깨를 줍는 동척이여! 무용한 망상으로 막대한 결손을 가져와 무고한 백의농민의 고혈을 빨아 먹기에 여념이 없는 동척이여! 구시대의 유물로서 조선인의 무한의 원부(怨府)를 스스로 만든 동척! 조선 민중의 행복과 양립되지 않는 너 동척아!'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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