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에세이 산책] 밸런타인 데이

작년 이맘때 나는 와인 잔에 홀려 있었다. 가는 허리를 흘러내리는 곡선의 아름다움은 말할 것도 없고, 그러면서도 부드럽지 않은 도도한 모습에 빠져서 갖가지 와인 잔을 구입했었다. 술 한 잔 못하는 내가 그것을 사모으는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인생의 달고 쓴 맛을 담기도 하고, 구애의 징검다리가 되어 살아야했던 와인 잔을 들여다보며 또 다른 용도를 생각해 냈던 것이다. 사람이든 사물이든 노출된 환경에 따라 삶의 모습이 달라진 예를 많이 보게 된다. 와인 잔도 마찬가지다.

때마침 밸런타인 데이가 다가왔다. 해마다 변신에 변신을 거듭한 초콜릿은 저마다 호화로운 옷을 입고 잘 포장된 방에 갇혀 있다가 정인의 손길에 숨통을 트는 연중행사를 치르게 된다. 이것은 매년 사랑의 전달사로 초콜릿이 겪는 특별한 고충일 게다. 식상한 이도 많겠지만 어쨌거나 이 행사는 우리에게 살금살금 파고들어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은 지 오래 되었다.

하지만 너무 많은 양의 초콜릿과 과대포장의 낭비를 보면서 매번 아까운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조금 다른 생각을 해낸 것이 와인 잔에 초콜릿을 담고 리본을 매는 누드포장 방법이었다. 쓰레기 걱정 없고, 와인 잔은 다시 쓸 수 있으니 껍질 없는 순 알맹이 선물이 되었다. 이렇게 와인 잔의 새로운 용도는 주변 사람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그런데 문제는 다 먹지 못하고 버리게 되는 초콜릿에 있었다. 그래서 올해는 더 특별한 방법을 생각해 냈다.

다가오는 밸런타인 데이는 설날과 겹친다. 밸런타인 데이의 여러 유래 중의 하나와 설 풍습이 맞아 떨어지는 해다. 설은 우리 조상들을 추모하는 날이다. 밸런타인 데이도 어느 순교자를 추모하는 의식에서 비롯되었다는 풍설이 있다. 밸런타인 데이가 우리나라에 건너와서 연인들의 행사로만 앉아버렸지만 본뜻은 더 포괄적인 사랑이다.

올해는 친지들과 이웃들에게 초콜릿 대신 우리의 조율이시(棗栗梨枾)와 떡을 선물해 보면 어떨까 싶다. 똑같이 담을 수는 없지만 영원한 인연을 상징하는 밤과 자손 번창의 대추, 그리고 올바른 인격 완성을 의미하는 곶감 정도는 괜찮을 성싶다. 또, 요즘은 초콜릿 뺨칠 만큼 예쁜 떡이 많다. 몸과 마음이 하나로 찰싹 붙으라는 의미의 인절미나 속이 꽉 차고 넓은 마음을 가지라는 오색 송편 등 갖가지 떡을 예쁘게 담는다면 밸런타인 데이 기분도 살리고 명절 분위기도 낼 수 있을 것이다. 이 특별한 선물은 연인 간의 애정은 물론이고 세대 간 소통의 도구도 될 것이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는 형상이 되어버렸지만 밸런타인 데이도 우리 풍습에 맞게 고쳐 나간다면 그것대로 의미 있는 행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주인석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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