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산사랑 산사람] 선자령 눈꽃 트레킹

광활한 고원…한국의 알프스 연출

대관령은 강원도를 영동(嶺東)과 영서(嶺西)로 나누는 분기점. 예로부터 동해의 특산물을 내륙으로 실어 나르던 해산물의 교역로다. 소년 율곡이 신사임당의 손을 잡고 외가로 나들이를 다니던 길. 후삼국 맹주 궁예가 동해의 패권을 다투며 명주성을 칠 때 군마(軍馬)를 몰았던 길. 그 길에서 살짝 비켜서 높은 비탈로 몸을 일으킨 산이 있으니 그 곳이 바로 선자령(仙子嶺)이다. 선자령은 백두-금강-설악에서 뻗어온 백두대간 산맥을 이어 받아 태백-오대산으로 연결해주는 대간의 준령이다. 1,100m 고원에 광활한 평탄면을 이뤄 '남한의 지붕'으로 일컫는다. 광활함에서 북의 개마고원과 곧잘 비교되며 경관 면에서 산군들의 장쾌한 파노라마는 알프스산맥과 견주기도 한다.

◆고원에 펼쳐지는 은빛설원

영서지방의 대륙편서풍과 영동지방의 습기를 머금은 해풍은 대관령 고원의 냉기류와 만나 눈을 만든다. 연평균 기온은 6.4℃로 남한에서 가장 먼저 서리가 내린다. 이 눈들은 사방 수 백리에 펼쳐진 고원을 하얗게 물들이며 겨울마다 설국을 연출한다. 안단테풍으로 펼쳐지는 평원의 눈은 단순하다. 거기엔 조망과 감상만 있을 뿐 오르려는 도전욕구를 자극하지 못한다. 면(面)으로만 펼쳐지는 풍경이 단조롭다면 언덕이나 비탈로 오르면 어떨까. 그 것이 대관령에서 선자령의 존재이유요 높은 몸값에 대한 설명이다.

대관령휴게소에서 오르막길로 잠시 오르면 갈림길이 나온다. 왼쪽으로 가면 양떼목장이 있고 오른쪽길이 선자령으로 향하는 길이다. 북쪽으로 이어지는 길을 걷다 국사성황사가 나오면 오른쪽 길을 택해 오르면 된다. 산길은 그리 급하지 않은 언덕길의 연속이다. 등산로의 눈은 발목을 겨우 덮을 정도지만 길옆 도랑은 스틱이 반쯤 잠길 정도로 적설(積雪)은 넉넉하다.

신(神)들의 정원인 듯 일망무제로 펼쳐진 설백의 산너울에 감탄사만 연발한다. 소설이나 시에서 보았던 은세계, 은빛설원이란 표현은 바로 이 경치를 설명하기 위한 어휘인 듯 싶다. 눈이 많이 올 때는 허리까지 빠지는 탓에 허우적거리며 산을 오를 때도 있다는 가이드의 엄살에 잠시 호흡을 가다듬는다.

◆선자령 명물 풍력발전기

광활한 설원의 바람 길에는 선자령의 명물 풍력발전기가 거센 진동음을 토해내며 날개를 돌린다. 날개의 힘찬 회전에서 어릴 적 바람개비 놀이를 떠올린다. 유년기에 바람은 우리에게 유희였다. 바람 위에 동심을 띄우면 연날리기가 되고 바람을 회전운동으로 바꾸면 바람개비가 된다. 차이점이라면 동심의 추억이 이제는 전기를 만드는 산업동력으로 바뀌었다는 점. 대관령, 선자령 일대에는 모두 53개의 풍력발전기가 있다. 멀리서보면 바람개비처럼 앙증맞지만 실제로는 날개 직경이 90m나 되는 거대한 구조물이다. 80m기둥 밑에 서면 바람을 갈아내는 날개의 기계음에 전율이 일 정도다. 이 발전기로 연간 24만Mw의 전기를 생산해 5만가구가 이 전력을 쓸 수 있다고 한다.

바람이 휩쓸고 간 산등성이엔 나무들이 낮게 몸을 눕혔다. 순응한 나무들은 바람결을 따라 질서 있게 누웠다. 마치 빗질을 해 놓은 듯. 그 사이로 난 좁은 산길을 한참 오르면 새봉(1,070m)이 나온다. 바람이 너무 세 새들도 쉬어갈 수 없다고 해서 붙은 이름.

◆ 정상에 서면 발왕산'계방산'오대산 한눈에

정상은 이제 코앞이다. 새봉에서 마지막 피치를 올리며 한걸음에 정상으로 내달린다. 집채 만한 정상석이 일행을 맞는다.

일행은 거친 바람 속에 펼쳐진 광활한 스카이라인에 젖어든다. 남쪽으로 발왕산, 서쪽으로 계방산 오대산이 북쪽에서 황병산이 장쾌한 설원을 펼쳤다. 흐린 시야 속으로 강릉시내가 아득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맑은 날에는 강릉앞바다의 파란 물결까지 시선에 담을 수 있다고 한다.

최근에 세워진 듯한 전망대엔 등산객들이 기념사진을 찍느라 분주하다. 플래카드를 휘날리며 구호를 외치는 팀도 보인다. 아마도 노조(勞組)에서 단합대회를 온 듯하다. 오늘 저들의 설원 결의는 조직에 큰 활력이 될 것이다.

문득 한 가지 궁금증이 든다. 왜 이 높은 산에 산 이름 대신에 재령(嶺)자를 얻어 달았을까. 고지도에도 대관산, 보현산 등으로 표기되었다는데, 아마도 대관령과 지리적으로 인접해 있고 또 평원이 같이 맞닿아 있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정상석 왼편으로 대관령의 삼양목장이 은빛 물결로 펼쳐졌다. 사방으로 트인 시야 탓에 청량감은 갑절이고 시리도록 차가운 바람에 온갖 상념이 모두 희석되는 것 같다.

여름철 이 능선이 초록물결로 일렁이면 유럽 알프스의 진경이 연출된다고 하니 상상만으로 기분이 유쾌해진다.

일찍부터 평창은 '해피 700'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세웠다. 사람이 살기에 가장 좋은 고도가 그 높이라고 한다. 파키스탄 훈자(Hunza)를 비롯한 세계의 유명한 장수촌들이 고원지대에 많이 분포된 점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가 된다. 자치단체들이 앞다퉈 내세우는 로하스(lohas)니, 그린이니 하는 추상적인 브랜드보다 훨씬 체감되고 호소력 있는 구호가 아닌가 생각된다.

◆초막리 하산길은 "원시의 계곡"

하산 길은 초막리로 잡는다. 등산로에서는 다져진 눈을 밟으며 올랐기 때문에 답설(踏雪)의 즐거움이 덜했지만 이제부터는 야생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과연 계곡은 원시의 설원이었다. 스페츠를 신지 않으면 산행이 불가능 할 정도. 길섶으로 잠시 발을 헛디딜라치면 금세 허벅지까지 빠져든다.

흐린 연무 사이로 종점 터미널이 보인다. 산 아래부터 뻗어 올라온 도로가 유려한 곡선을 만들었다. 동네 주민들에 의하면 50, 60년 전만해도 이 지역엔 산적들이 제법 있었다고 한다. 해산물을 실어 나르는 목탄차를 세워 약간의 통행료와 술안주 감을 받아 챙기곤 했다. 재밌는 것은 차가 고장이 나거나 힘에 부쳐 끙끙 거리면 모두 달려들어 차를 밀어주고 수리를 도왔다고 한다. 말이 산적이지 술값요량이나 하러 나온 지역의 악동들이었던 것이다.

요즘 지구촌의 이상기온으로 눈들도 살짝 정상궤도를 빗나가고 있다. 그리 넓지 않은 나라 안에서도 스키와 해수욕을 동시에 즐긴다는 뉴스도 나온다. 호남에 폭설이 내리고 충청지역 시설재배 농민들도 겨울이면 조바심을 낸다. 하지만 이 폭설 속에서 웃는 사람도 있으니, 바로 겨울을 기다려온 등산객들이다. 농민들에게는 재해지만 산꾼들에겐 기회가 되니 이 역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글'사진 한상갑기자 arira6@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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