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연방대법원은 2003년 동성애자의 성행위를 처벌하는 텍사스주의 소도미법(Sodomy Law)이 위헌이라고 선언했다. 이 판결은 1954년 공립학교에서 흑백 분리를 결정한 캔자스주 토피카 교육위원회의 조치에 대한 위헌 판결과 함께 연방대법원이 내린 가장 기념비적인 판결로 꼽힌다. 그러나 17년 전인 1986년에는 소도미법과 같은 내용인 조지아주의 동성애 금지법을 합헌으로 판결했었다.
왜 연방대법원은 17년의 시차를 두고 자신의 판결을 뒤집었을까. 1986년 당시 동성애 금지법이 시행되고 있던 주는 25개에 달했으나 2003년에는 4개로 줄었다. 이는 동성애자도 사생활을 존중받을 권리가 있다는 쪽으로 사회 인식이 변했음을 뜻한다. 연방대법원의 동성애 합헌 판결은 이 같은 변화를 적극 수용한 것이다. "성인들이 서로 동의할 경우 사적인 공간에서 자유롭게 성적인 행위를 할 수 있다는 것이 사회적으로 인정되기 시작했다"는 판결 취지는 이를 잘 보여준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이 판결이 당시 레이건 대통령이 지명한 보수주의자인 앤서비 케네디 대법원 판사가 작성한 의견서를 통해서 이뤄졌다는 점이다.
연방대법원은 이처럼 시대의 한 획을 긋는 판결들을 많이 내놓았다. 이 중 상당수는 당시의 사회통념을 깨는 것으로 비쳐지기도 했다. 그래서 미국인들 사이에서 연방대법원은 다수 의견에 반대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사실은 그 반대다. 연방대법원의 판결은 동시대 미국인의 일반적 신념을 충실히 반영한 것이 다수였다. "연방대법원의 가장 대담한 판결조차도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다수 의견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었다."(카스 R 선스타인 하버드대 교수)는 것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사례는 수두룩하다. 대표적인 판결 중의 하나가 앞서 거론한 공립학교 내 인종 분리 정책에 대한 위헌 선언이다. 이 판결은 당시 미국 내에서 폭넓은 지지를 받았다. 이 같은 사실은 역으로 당시 많은 미국인들이 교육기관 내에서의 인종 분리에 반대하고 있었음을 뜻한다. 인종 간 격리를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1900년대 초반이었다면 이런 판결은 나올 수 없었을 것이란 게 미국 법학자들의 주장이다. 결혼한 부부의 피임약 사용을 금지한 코네티컷주의 피임 금지법에 대한 1965년의 위헌 판결도 마찬가지다. 이 판결은 코네티컷주에서 결혼한 부부의 상당수가 피임약을 사용하고 있다는 객관적 사실을 바탕으로 나왔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연방대법원이 스스로 변화를 추구한 것이 아니라 동성애자 처벌이 정당하지 않고 결혼한 부부의 피임 금지가 부당하다는 사회 전반의 의견을 연방대법원이 따랐다는 것이다.
이 같은 사실은 최근 '튀는 판결'로 물의를 빚고 있는 우리 법원에도 시사하는 점이 많다. 판결은 판사 고유의 권한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회적 공감과 상식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다수의 견해나 상식이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다. 상식은 "18세 이하의 젊은이의 마음에 억지로 심어 놓은 편견 덩어리"라는 아인슈타인의 말처럼 사물이나 사회를 새롭게 볼 수 있는 시각을 제한하기도 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상식은 다른 사람들의 다양한 경험과 지혜가 응축된 집단지식이기도 하다. 내가 배우거나 겪지 못한 경험적 지식이 그 속에 녹아 있다는 뜻이다. 이는 사회 구성원 대다수가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일반적이다. 이렇게 본다면 법원의 판결은 일반적 진리를 확인하는 법률적 판단 행위라고 할 수 있다. 판결이 판사의 내밀한 개인적 경험이나 정치적 신념에 좌우될 때 판결은 이러한 일반성을 상실한 편견이 될 가능성이 높다. 잘못하다가는 매명(賣名)을 위한 소영웅주의라는 비판을 받기 십상이다.
다수의 의견이 반드시 진리가 아니듯이 소수의 의견 역시 반드시 옳다고 할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소수 의견도 존중받아야 하지만 그렇다고 상식에 반하는 견해가 다중(多衆)의 무지몽매(無知蒙昧)를 일깨우는 선구적 진리처럼 포장되어서도 안 된다. 미국 연방대법원이 내린 역사적 판결들은 결코 대중과 유리된 고매한 사람들의 계몽 행위가 아니었다.
鄭敬勳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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