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동행]경북을 걷다-<8>영천 보현산, 하늘 길을 걷다

별 찾아 오르던 길, 별은 해 뒤로 숨고 얼음꽃이 먼저 반기네

천수누림길은 그리 길지 않다. 하지만 발을 내딛으면 어디선가 새소리와 음악이 흘러나온다. 흥겹게 허위허위 걸을 수 있는 길이다.
천수누림길은 그리 길지 않다. 하지만 발을 내딛으면 어디선가 새소리와 음악이 흘러나온다. 흥겹게 허위허위 걸을 수 있는 길이다.

길 안내를 맡은 영천시 관광산업진흥팀 이원조씨가 자료를 보내오며 이메일 끝에 '영천'이란 이름의 역사에 대해 간략하게 덧붙여왔다. 내용은 이러했다. 먼 옛날 부족국가 시절에 이곳은 '골벌국'(骨伐國)이었다. 영천향토사연구회가 펴내는 연구지의 제목도 '골벌'이다. 지금 뜻으로 풀이하면 '끝벌'이란 의미라고 했다. 경주가 서라벌, 대구가 달구벌, 상주가 사벌로 불렸듯이 영천은 골벌, 즉 끝벌이었다. 신라 이전까지 그렇게 불렸다. 당시만 해도 영천은 사로국(경주)의 서쪽 변방에 머물렀고, 신라 본국에 예속되지 않았지만 우호적 관계의 든든한 소국이었기 때문이라고. 그러다가 서기 236년에 영천은 '절야화군'(切也火郡)으로, 신녕지역은 '사정화현'(史丁火縣)이 됐고, 757년(신라 경덕왕 16년) '임고군'으로, 신라 말기엔 다시 '고울부'로 불렸다. 그러던 것이 고려시대 영주(永州))에서 1413년(조선 태종) 영천으로 바뀌게 된다. 한때 변방나라 '끝벌'이던 영천은 한방진흥특구도시로, 경마공원 유치도시로 재도약을 꿈꾸고 있다.

하늘은 푸르고 바람은 잔잔했다. 저 멀리 산줄기와 들판 위로 뭉게구름이 피어올랐다. 그저 뭉실뭉실 피어올라 제멋에 형상을 갖추었다가 이내 흩어져버리는 그런 구름이 아니었다. 방앗간에서 쌀을 빻을 때 얇게 삐져나오는, 마치 물결 모양을 닮은 예쁜 구름이 서쪽 하늘에 슬그머니 걸쳐 누웠다. 동행한 작가 김윤종은 끝없이 펼쳐진 지평선 위에 파도처럼 격정적으로 피어오르는 구름을 즐겨 그린다. 작가는 "오늘 날씨만 봐도 멋진 작품 한 점 나올 수 있겠다"며 어린아이처럼 해 맑은 웃음을 지어보였다.

영천시에서 35번 국도를 타고 안동·청송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먼저 화북면 자천리 '오리장림'(五里長林)이 길손을 반갑게 맞이한다. 자천숲으로도 알려진 이곳은 옛날 도로가 나기 전에 2km(5리)에 걸쳐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숲이 생기고 400여년 전부터 마을 주민들은 매년 정월 대보름 자정에 제사를 올렸고, 봄에 잎이 무성하면 그 해에 풍년이 깃든다고 믿었다. 예전 모습 그대로였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볼거리였을 것이다. 하지만 국도가 숲을 갈라버리고, 태풍이 불어닥치며 숲은 제모습을 많이 잃었다. 지금은 왕버들나무, 굴참나무, 느티나무, 팽나무, 회화나무 등 10여 종이 넘는 20~350년 된 거목들이 자태를 뽐내고 있다.

잠시 더 차를 타고 달리다가 '보현산천문대'를 향하는 오른쪽 길을 택했다. 군도 8호선이며 '별빛로'라는 애칭을 갖고 있다. 가로등 모양이 유별나다. 다른 곳과는 달리 가로등마다 갓을 씌워놓았다. 행여 산꼭대기 천문대에서 별을 관측할 때 아래쪽 밝은 빛 때문에 방해가 될까봐 그런 조치를 했단다. 천문대를 아끼는 영천시의 마음 씀씀이가 참 예쁘다. 오른쪽으로 횡계구곡을 따라 길을 오르면 모고헌(慕古軒·경북도 유형문화재 제271호)와 옥간정(玉磵亭·경북도 유형문화재 제270호)이 나온다. 조선 숙종 때 성리학자인 정만양, 정규양 형제가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지은 건물들이다. 옛 정취가 그대로 남아있어 잠시 길을 멈추고 세월의 무상함에 젖어봄 직하다.

다시 보현산천문대로 길을 잡았다. 행여 잔설이 남아있을까 걱정했더니 흔적조차 사라졌다. 몇 해 전 우연한 기회로 이곳을 찾은 적이 있었다. 태풍 '매미'가 할퀴고 간 생채기가 산길 곳곳에 남아있었다. 마치 심술궂은 괴물이 보현산 줄기를 마구 긁어놓은 듯 산길 여기저기에 산사태가 났고, 그 상처는 꽤 오래 남았다. 천문대까지 오르는 길은 20여 차례 굽이를 이룬 뒤에야 능선줄기에 다다른다. 예전에는 차를 타고 바로 천문대까지 올랐지만 지금은 다르다. 아래쪽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여기서부터 오늘의 첫 걸음길인 '천수누림길'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천문대 약간 아래쪽 길을 따라 전망대와 정상인 시루봉까지 1km 구간을 나무길로 꾸며놓았다.

차에서 내려서자 "아!"하는 탄성이 절로 나왔다. "좋다"라는 추임새를 넣을 정신도 없었다. 동행한 김윤종 작가와 길안내를 맡은 이원조씨, 영천시 공보담당 정상용씨 모두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차를 타고 올라온 길은 보현산 남쪽 사면. 따사로운 햇살 덕분에 눈이 온 흔적조차 없지만 반대쪽 북사면은 전혀 딴 세상이었다. 눈꽃이 아니라 얼음꽃이었다. 몰아치는 삭풍 속에 나뭇가지마다 얼음꽃이 만발했다. 햇살 속에 반짝거리는 그 얼음꽃을 뭐라고 표현하리오. 일년 365일 중 그런 장관을 볼 수 있는 날은 드물디 드물다. 벌써 수십 차례 보현산에 올랐다는 이원조씨도 연방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기에 바빴다. 아래 펼쳐진 산하는 드문드문 빛바랜 녹색에다 숨 죽은 회색빛이 가득한 반면 정상부에는 눈 돌리는 곳마다 은빛 향연이 펼쳐졌다. 가지에 맺힌 얼음줄기 위로 햇살이 뜀박질을 하며 논다. 꿈처럼 펼쳐진 이 모습을 글과 사진으로밖에 남길 수 없어 아쉽기 그지없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은빛 놀이터 한가운데 와 있는 듯 하다.

감탄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 '천수누림길'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어디선가 새소리와 함께 음악이 흘러나온다. 목재데크길 아래 스피커를 숨겨놓았다. 사람이 발을 디디면 그것을 감지해서 음악이 시작됐다. 길 중간에 만든 전망대들도 별 모양을 따왔다. 세심한 배려다. 저 아래 별빛마을이 손에 잡힐 듯 다가서고, 그 건너편이 기룡산이다. 영천의 물줄기는 여기서 비롯한다. 감상에 젖을 틈도 잠시. 어느 새 정상부인 시루봉에 다다른다. 앞서 주차장에서 본 절경은 예고편에 불과했다. 전망대에 올라서자 사각사각 얼음꽃이 밟힌다. 휘몰아치는 바람 덕분에 나무 기둥에 맺힌 얼음꽃이 기하학적인 문양을 이뤘다. 회오리치기도 하고, 갈짓자로 꼬리를 감추기도 한다. 세상 어느 곳에서도 보기 힘든 예쁜 모양새다. 사람의 손으로 이런 문양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오늘은 정말 '운수 좋은 날'임에 틀림없다.

시루봉 정상에서 천문대를 바라보면 왼편이 북쪽인 청송, 오른편이 남쪽인 영천이다. 산줄기를 경계로 마치 가리마를 타듯이 색깔이 극명하게 나뉜다. 다소 생기를 잃은 겨울산의 회녹색이 자욱한 남쪽 사면과 달리 북쪽 사면은 그야말로 은빛 천국이다. 눈의 즐거움을 만끽하며 천문대를 거쳐 '천수누림길'의 출발점인 주차장으로 내려왔다. 왕복 2km 정도. 뭔가 아쉽다. 이마에 땀방울도 맺히기 전이다. 그렇게 돌아서려니 보현산이 꾸짖을 것만 같다. 그래도 산행이라면 땀줄기 한번은 흘려야 하는데. 그런 사람들을 위해 '웰빙숲길'이 만들어졌다. 앞서 천문대로 오르는 길을 잠시 내려오면 갈림길에서 안내판이 보인다. 길을 따라 그대로 가면 화북면 정각리(별빛마을)이고, 반대편 산으로 오르는 길을 택하면 포항시 죽장면 두마리가 나온다. 그 사잇길이 바로 웰빙숲길이다. 보현상 정상인 시루봉에서 내려다보면 갈짓자로 굽이치는 산길이 보이는데 바로 그 길을 탈 수 있다. 사실 웰빙숲길의 입구는 더 아랫쪽에 있다. 최근 영천시는 다양한 테마숲길을 꾸며놓으며, 그 입구에 큼지막한 표지판을 만들어두었다. 거기서부터 걸어올라도 좋다. 반대로 정상에서 내려오면서 숲길을 택해도 후회는 없다. 웰빙숲길의 모태는 임도다. 그래서 길도 넓고 평탄한 편이다. 앞서 갈림길에서 보면 숲길로 가는 두 갈래 길이 있다. 하나는 원래 임도이고, 다른 하나는 최근 영천시가 만든 목재데크길이다. 어느 쪽으로 가나 500여m쯤 가면 다시 '2층 팔각전망대'에서 만나도록 돼 있다. 지도를 보면 천문대가 있는 보현산(1,124m) 서쪽으로 '작은보현산'(826m)이 있다. 지금 걷는 임도는 바로 작은보현산 자락길로 보면 된다. 웰빙숲길은 걷는 재미가 무척 쏠쏠하다. 숨이 가쁠 필요도 없고 산보하듯이 천천히 내려걸으면 된다.

행여 심심할까봐 곳곳에 '숲치료길'을 만들어두었다. '2층 팔각전망대'에 이르면, 가던 임도를 그대로 따라 갈 수도 있고, 조금 가파르게 내려가는 숲치료길도 만날 수 있다. 이런 숲치료길은 임도를 따라 곳곳에 조성돼 있고, 나름대로 색다른 수종의 나무도 심어놓았다. 자녀들과 함께 오기에 안성맞춤인 곳이다. 곳곳에 나무팻말도 있다. 나무 이름과 함께 특징과 효능까지 적어놓았다. 아직 산길을 만들었을 뿐 다져지지 않아서 조금 불편할 수도 있다. 게다가 흙 속의 얼음이 오후 햇살 속에 녹으면서 질퍽거렸다. 맑은 봄날이라면 평탄한 임도도 좋지만 숲치료길을 거닐어 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임도를 따라 걷는 거리는 4km가 조금 넘는다. 왕복해도 충분한 거리.

산 아래 별빛마을에는 영천시가 만든 '천문과학관'이 있다. '별의 수도, 별의 도시' 영천이라는 이름답게 작지만 알차게 꾸며놓은 공간이다. 1.8m 광학망원경과 함께 5D 돔영상관에서 가상현실을 체험할 수도 있다. 사전에 홈페이지(www.staryc.com)에서 예약현황 및 관측가능시간을 확인하는 것이 필요하다. 별의 도시에서 만난 '하늘길'은 자녀들과 함께 오붓하게 걷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다.

글·사진=김수용기자 ksy@msnet.co.kr

도움말=영천시 관광산업진흥팀 이원조 054)330-6068

전시장소 협찬=대백프라자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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