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사람과 歲月] "평생 농사 짓긴 싫었죠" 소설가 송일호(상)

맨몸으로 야반도주 그때부터 소설같은 삶

등단 47년을 맞은 소설가 송일호(72)씨는 말 그대로 소설 같은 삶을 살았다. 경북 김천이 고향인 그는 아버지의 강권으로 농사를 지었다. 공부를 꽤 잘했는데, 아버지는 공부를 더 잘하는 형(당시 서울대 재학)을 미느라 둘째인 그에게는 가업인 농사를 권했다.

"네 형이 성공하는 것이 집안을 일으키는 것이고, 그러면 너희들도 걱정할 게 없다."

아버지에게 붙들린 그는 농사를 지었다. 해뜰 때부터 해질 때까지 끝없이 이어지는 농사는 힘들고 지겨웠다. 게다가 공부에 대한 미련을 버릴 수 없었다.

"평생 논밭에서 아침 해를 맞이하고 지는 해를 바라보기는 싫었어요. 맨몸으로 야반도주했지요."

1960년대 초, 대구가 넓으면 얼마나 넓었을까. 그러나 농촌 출신이었던 그에게 대구는 대처였고, 기회의 땅이었다. 대구에는 먹여주고, 재워주고, 공부까지 시켜주는 일자리가 있을 줄 알았다. 대구에 도착한 날부터 한 달 넘게 여기저기를 찾아다니며 "사람 안 쓸 겁니까?" 라고 물었다. 그러나 먹여주고, 재워주고, 학교도 다니게 해주겠다는 어디에도 직장은 없었다.

"돈을 벌면서 공부하려면 장사밖에 없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책장사였다. 책을 좋아했기에 망해도 책은 남는다는 생각으로 등록금을 자본으로 서점을 열었던 것이다. '희망서점'이라고 구멍가게처럼 작은 서점이었는데, 장사가 잘 됐다. 문을 열면 아침부터 손님이 몰려왔다. 당시 대구에는 크고 작은 서점을 합쳐도 15개 정도가 전부였다. 요즘처럼 대형문고가 시장을 장악하는 구조도 아니었다.

대학생이자 서점 주인이었던 그는 농촌 계몽운동에 뛰어들었다. 도시에 비해 농촌에는 기회가 너무나 작다는 것을 알았고, 그것이 때로는 도시에 대한 반감으로, 때로는 농촌에 대한 온정으로 기울었다. 학교(경북대)에 '농촌출신 학우회'를 만들어, 농촌 학생들의 학업을 지원하고, 농촌으로 순회를 다니며, '잘 사는 농촌을 만들자'며 호소했다. 사람들을 끌어 모으기 위해 영화를 상영했고, 경북도내 각 군별로 3일씩 영화 상영과 함께 농촌의 살길을 역설하기도 했다. 그때만 해도 스피커와 스크린 시설을 갖춘 공간이 드물었고, 그런 시설 있는 공간을 빌리기 위해 군인 출신이었던 경북도지사와 담판을 벌여 양해를 얻어냈다.

도시로 유학 온 농촌 학생들을 위한 기숙사를 짓기 위해 대구의 각 대학교 학생들과 캠페인을 벌였다. 자신이 운영하던 서점을 농촌출신학우회에 기증하고, 대학생들이 그 서점에서 책을 구매함으로써 그 이윤으로 기숙사를 짓겠다는 구상이었다.

이들의 자활 의지를 높이 평가했던 매일신문은 '책속에 길이 있다. 등록금으로 시작했던 구멍가게, 농촌학생 재활길 찾으며, 희망서적 송일호' 라는 제하의 기사로 힘을 실어주었다.

기숙사를 짓기 위해 외상으로 책을 사고파는 동안 엄청난 빚더미에 올랐고, 그 책임을 진 그는 거지가 됐다. 걸인이 돼 산속 움막에서 자기도 하고, 채 자라지도 익지도 않은 참외를 먹으며 연명하기도 했다. 당시 신축 중이던 경북도청 건물에 올라가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열혈 문학청년이었던 그는 시인이자 평론가로 이름을 날리던 최광렬 선생을 찾아가 습작한 소설 원고를 내밀었다. 부디 읽어주시고, 고견을 기다린다는 말씀과 함께 술 대접도 했다. 그러나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도 연락이 없었다. 그를 만날 길도 없었다. 최 선생이 자주 들르는 다방에 전언을 남기기도 하고, 글을 남기기도 했다. 그렇게 100일 만에 어렵게 원고를 돌려받았는데, 단 한 줄도 고친 곳이 없었고, 밑줄 하나 친 곳이 없었다.

술 사고 밥 사고, 그토록 부탁했는데, 그 오랜 날들 동안 읽지도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최 선생에게 좋지 않은 기억을 갖고 있던 차에 경북 경주에서 웅변대회가 열렸다. 아마 1961년 혹은 1962년일 것이다.

"웅변이라면 자신 있었어요. 전국 대회에서 특등을 한 적도 있었으니까요."

웅변대회 1등 부상이 시계였다. 시계를 부상으로 받으면 친구들과 밤새 술을 마실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20명이 넘는 친구들을 데리고 경주로 향했다. 그러나 무슨 악연이었던지 최광렬 선생이 심사 위원이었다. 그는 송일호씨를 1등 없는 2등에 당선시켰다. 부상으로 기대했던 시계는 물거품이 돼 버렸다. 함께 갔던 친구들은 막걸리는커녕 맹물만 마시고 돌아와야 했다.

최광렬씨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가졌던 송일호씨는 어느 날 문인들이 어울리는 자리에서 도라지 위스키를 마시고 취해 버렸다. 취기가 오르자 분노가 폭발했고 그는 다짜고짜 최 선생에게 달려들었다. 나이 지긋하고 문인으로 이름을 날리던 최 선생은 도망치느라 체면을 잃었다.

"지금 생각하면 미안합니다. 무명 작가의 글을 읽는 것이 쉬운 일입니까? 그것도 평가를 하려면 정독을 해야 하는데 여간 성가신 일이 아니지요. 이름난 작가의 책도 읽기 싫은 판국인데 말입니다. 선배가 되고보니 제게도 자기 원고 좀 읽어달라는 사람들이 있는데 사실 참 귀찮습니다. 허허."

1964년 지방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한 송일호씨는 그 뒤 중앙지 신춘문예에 도전하느라 5년 동안 소설쓰기에 매달렸다. 그러나 매번 본심에서 탈락했다. 예심에서 떨어졌다면 아예 포기했을 것이다. 그러나 늘 본심에 오르고 '조금 더 분투하라'라는 가능성 있는 평가를 받고 보니 포기할 수도 없었다.

"글쓰기에 매달리느라 5년 동안 직업이 없었어요. 결혼을 했고, 아이도 있었는데 살길이 막막했지요. 그래서 여기저기 돈을 빌리려 다녔지요."

당시 출판 도매업을 크게 하던 하임수씨를 찾아가 돈 좀 꿔달라고 부탁했다. 그를 소주 집으로 데리고 간 하씨는 다짜고짜 따귀를 올려붙였다. 그것도 양쪽으로 번갈아 가면서.

"야이 자식아! 문학이 밥 먹여주냐? 돈 벌어라!"

하씨는 벌떡 일어나 나가버렸고, 그는 홀로 남아 소주 2병을 안주도 없이 마셨다.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송일호씨는 그날 문학을 버렸다고 했다. 집으로 돌아와 문학 서적과 그때까지 쓴 육필 원고를 모두 불태웠다. 다시는 문학 같은 것은 쳐다보지도 않겠다고 맹세했다. 그날부터 돈벌이에 나섰다. 전국의 일류 잡지 50개 정도를 도매로 팔았는데, 한강 이남에서는 제일 큰 도매상으로 이름을 떨치기도 했다.

그러나 1997년 외환위기 때 출판사들이 하나둘 넘어졌고, 받은 어음은 종이조각이 됐다. 그 길로 책 도매업도 그만두었다. 자신이 갚아야 할 빚은 갚고, 받아야 할 것은 거의 받지 못하는 바람에 큰돈을 벌었지만 손에 남는 것은 별로 없었다. 그리고 다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쳐다보지도 않겠다는 소설이었지만, 책 도매업을 하는 동안에도 잊어본 적이 없는 로망이었다.

"후회가 막심합니다. 그 시절 불태운 원고는 내 젊은 시절의 열정입니다. 지금은 그런 글을 쓸 힘이 없어요. 젊음으로 썼던 글들을 모두 태워버렸으니, 원 참."

15년 전 이사를 위해 짐을 싸다가 반쯤은 없어진 너덜너덜한 원고를 발견했는데, 젊은 날의 초상을 보는 것 같아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세월에 삭은 원고지에 적힌 글씨들, 작품 전체도 아니고, 일부만 남아있는 모양이 자신의 젊은 날을 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반쯤 남아 삭은 원고지가 내 인생 같았어요. 소설쓰기나 돈벌이 어느 쪽에서도 완성된 작품을 만들지 못했구나 싶은 자괴감 같은 거요. 요즘도 꿈에 원고를 태우던 시절이 나와요. 마음에 한이 된 것이지요. 문학이란 거는 포기하거나 버릴 수 있는 게 아니예요. 문학병은 한번 걸리면 치유가 안 되는 고질병이지요."

조두진기자 earful@msnet.co.kr

사진: 김태형기자 thkim21@msnet.co.kr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