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기자체험으로 자원봉사라, 왠지 뜻깊을 것 같았다. 지금까지 제대로 기억에 남는 봉사활동을 한 적이 없었던 터라 봉사의 참된 의미를 새겨보는 좋은 기회가 될 것 같았다. 하지만 남을 돕는다는 것 자체가 너무도 낯설어 혹시 방해나 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앞섰다.
목적지는 대구 요셉의 집(중구 교동). 이곳은 사회복지법인 성모자애원에서 1989년 문을 연 무료급식소다. 수·일요일을 제외하고 매주 5일 점심을 어려운 이들에게 제공하고 있다. 오랜 기간 꾸준히 무료급식을 계속해 이제는 대구의 대표적인 무료급식소로 자리를 잡았다.
18일 오전 10시, 기자가 찾아갔을 때는 급식 준비에 한창이었다. 식당과 주방은 자원봉사자들과 수녀님들이 뒤섞여 마치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모두가 워낙 바쁘게 움직이다 보니 그 틈바구니 사이로 취재를 시도하기가 녹록치 않았다. 어렵게 얻은 구순임 원장수녀와의 인터뷰 시간. 하지만 구 원장수녀는 이곳을 처음 방문한다는 기자의 말에 "기자가 여기가 처음이라니 말이 안 된다"며 핀잔어린 눈빛을 보냈다.
그는 기자가 못 미더운지 주방 일은 손대지 말고 식당 정리나 하라고 지시했다. 식당 일은 대구시청자원봉사회 회원들의 몫이었다. 한 달에 한번 꼴로 이곳을 찾는다는 봉사회 회원들은 식탁에 올려져 있는 의자들을 아래로 내려놓기에 분주했다. 봉사회 김성진(40·여)씨는 "무료로 급식을 제공하지만 식재료를 고르고 다듬으며 청소하는 일련의 과정 가운데 어느 하나도 허투루 하지 않는다"며 "처음에는 그런 모습에 무척 놀랐지만 이제는 적응이 돼 어떤 일이든 정성을 다한다"고 했다. 사실 이곳은 자원봉사자들 사이에서도 가장 힘든 곳으로 손꼽힌다고 한다. 하지만 김씨는 "몸이 힘든 만큼 뿌듯함이 더한 것 같다"고 미소를 지었다.
기자에게 처음 주어진 일은 행주로 식탁 닦기. 열심히 해보자는 일념에 10여분 동안 정신없이 손을 놀렸다. 서서히 팔과 어깨, 허리가 묵직해졌다. 가장 손쉬운 일인데도 초보자에겐 그리 만만하지가 않았다. 닦는 일을 마치자 허리와 팔이 쑤셨다. '그 정도에 힘들다고 하느냐'는 말을 들을까봐 내색은 못했지만 '휴' 하는 한숨이 입안을 절로 맴돌았다.
그 사이 식당 밖에서는 매서운 날씨인데도 급식을 기다리는 이들로 북새통이었다. 매일 60~70명 정도가 오전 7시만 되면 밖에서 하염없이 기다린다고 했다. 대부분 노숙자들인데 요즘은 젊은이들도 쉽사리 눈에 띈다고 했다. 구 원장수녀가 설명했다. "급식을 먹으려고 오는 사람들이 계속 늘어. 2년 전만 해도 하루 평균 500명이었는데 지금은 적어도 630명은 되거든. 설날 전날에는 700명 넘는 사람들이 이곳을 찾았어. 그 만큼 직장이 없고 경제가 어렵다는 거지."
오전 10시 30분. 기도 시간이 되자 주방 일을 거들던 대구은행 부인회 회원 15명 정도가 식당으로 나왔다. 5분간의 기도를 마치자 모두 식판을 들었다. 배식을 하기 전에 먼저 식사를 해두려는 것. 이날 메뉴는 두부국에 돼지고기두부볶음과 무 생채, 콩나물 무침이었다. 메뉴는 구 원장수녀가 정한다고 한다. 14년째 이곳 일을 돕고 있는 송정희(64)씨는 "식재료는 칠성시장이나 번개시장 등에 단골이 있어 매일 전화하거나 찾아가 해결한다"고 귀띔했다.
급식 시작 시간인 오전 11시가 가까워지자 자원봉사자들은 배식팀과 설거지팀, 식판 닦는 팀, 물컵 나눠주는 팀 등으로 나눠졌다. 드디어 오전 11시. 식당 문이 열리자 급식을 초조하게 기다리던 사람들은 마치 100m 경주를 하듯 쏜살같이 식당으로 들어왔다. 그 와중에 눈길을 끄는 장면이 있었다. 송씨가 사람들로부터 동전을 받고 있는 것. '어, 무료 급식이 아니네.' 송씨는 "100원을 받고 있는데 이는 먹은 데 대한 최소한의 대가를 치르라는 의미"라며 "사실 100원은 대가라기보다 사람들에게 급식의 소중함을 일깨우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일부 사람들은 100원이 없다며 그냥 휙 지나가버리기도 했다.
기자는 밥 푸는 일을 맡았다. 줄이 하염없이 이어지자 마음이 급해졌다. 많이 퍼달라는 이도 있고 조금만 퍼달라는 이도 있고, 사람들마다 주문이 달랐다. 정신없이 수십번 주걱을 들었다 놓았다 했더니 이내 팔이 저려왔다. 지켜보고 있던 한 자원봉사자가 못 참겠다는 듯 꾸짖었다. "그렇게 어설프게 하면 안 되죠. 밥을 요리조리 으깨고 다듬어서 퍼야죠. 식판에 퍼준 뒤에도 밥을 다듬어야 해요." 단순해 보였는데 밥 푸는 일에도 요령이 있었다. 뒤늦게 알고 보니 밥 푸는 일은 아무에게나 맡기지 않는다고 한다. 힘이 많이 들어가는데다 기술이 적잖이 필요해 일반 봉사자들은 잘 맡지 않는다는 것.
결국 배식팀에서 쫓겨난 기자는 설거지팀을 기웃거렸다. 어렵사리 식판 씻는 일을 배정받았다. 설거지는 그나마 자신 있다고 생각했는데 정신없이 쏟아지는 식판에 절로 "헉헉" 소리가 났다. 10여분 만에 눈앞이 노래졌다. '뭐 하나 수월한 게 없네'라며 한숨을 쉬는데 대구은행 봉사회 회원인 박성희(46·여)씨가 위로의 말을 건넸다. "우리 봉사회도 한 달에 다섯 군데 정도 봉사를 나가는데 이곳이 가장 힘들어요. 초창기에는 식판 닦는 일이 공사장 막일 못지 않았죠. 지금은 대구은행에서 식기세척기를 지원해준 덕분에 일이 많이 수월해졌어요."
이곳에서 고정적으로 봉사를 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본업을 가진 이도 적잖다. 백발의 이명근(79)씨가 그렇다. 인근에서 식당을 하는 그는 13년 전부터 매일 오전 이곳을 찾고 있다. 정오까지 이곳 일을 도운 뒤 식당 문을 연다는 것. 이씨는 "딸이 수녀라 이런 일이 낯설지 않다"며 "남에게 베푸는 것이 그냥 좋다"고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끊이지 않을 것 같던 발길도 정오가 넘자 뜸해지기 시작했다. 일주일 가운데 토요일에 가장 사람이 많고 목요일이 그나마 여유 있다고 했다. 송씨가 갑자기 기자를 불렀다. 슬며시 5만원을 쥐어주고 간 이가 있다는 것. 송씨는 "이런 일이 가끔 있다"며 "지금까지 이곳에서 도움을 받아 다시 일어선 사람들이 고마움에 보답하고자 하는 것 같다"고 했다. 오후 1시가 가까워지자 봉사자들은 식당의 의자를 다시 식탁에 올리고 마루를 걸레질하는 등 이날 급식을 마무리했다.
몇 시간을 정신없이 보냈지만 부끄러웠다. 봉사를 한답시고 왔는데 막상 별 도움이 안 됐다는 자책감 때문이었다. 구 원장수녀가 기자의 마음을 간파한 듯 말을 꺼냈다. "가끔 봉사자들이 너무 많이 몰려와 일을 배정하기가 쉽지 않고 오히려 혼란스러울 때도 있어. 하지만 도우려는 마음만으로도 고맙지. 그런 따뜻한 마음이 모여 이렇게 어려운 이들을 돕고 있으니까."
3시간의 짧은 체험이었지만 기자에게는 봉사의 의미를 평생 잊지 않게 해 준 고마운 기회였다. 어질어질 급식소를 빠져나오며 바라본 하늘이 유난히 파랗다.
전창훈기자 apolonj@msnet.co.kr
사진 성일권기자 sungi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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