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엄창석의 뉴스 갈라보기] 국채보상운동의 상상력

"2천만 동포가 석 달간 담배를 끊으면 한 사람이 한 달에 20전씩 모을 수 있으니 모두 1천300만 원은 될 것이다…. 이로써 강토를 보존할 수 있다."

좀 어처구니없어 보이는 저 말은 1907년 2월에 국채보상운동을 시작하면서 내건 취지문이다. 금연을 해서 나라 빚을 갚자는 소리다. 당시 일제가 우리나라를 병탄하기 전에 먼저 경제 기반을 붕괴시키려고 돈을 억지로 빌려주었고 급기야 우리 정부의 빚이 1천300만 원으로 부풀었는데, 그때의 국가재정으로는 갚기가 불가능한 규모였다. 이에 나라 빚을 갚으려고 서상돈 등이 대구에서 국채보상운동을 일으킨 것은 누구나 아는 바이다. 대구에서 발의된 '돈 갚기 운동'은 말 그대로 들불처럼 전 국토로 번져나갔다.

당시의 풍경은 너무나 쉽게 떠오른다. 항아리를 지고 오일장으로 가던 지게꾼이 길가에 앉아 궐련을 말다가 "에잇, 이따위를 안 피우고 나라를 구하자" 하며 궐련을 내치지 않았을까. 쇠죽을 끓이던 농민도, 사랑채 앞마당에서 감기에 걸려 콜록거리던 양반도 담배를 집어던지며 마치 담배가 일본이나 되는 양 신발로 짓뭉갰을 것이다. 이쯤 되면 꽤나 흥겨운 나라 구하기가 아닐 수 없었다. 오히려 더 신명난 쪽은 여자들이었던 것 같다. 비 온 뒤 풀 자라듯 수없이 결성된 여성단체들의 구호가 이를 말해준다.

"우리나라 1천만 여자 중에 반지를 낀 이가 반은 넘을 터이니, 대략 1천만 원이 여자 수중에 있다. 여자의 손가락을 속박하는 이 지환을 뽑아 국채를 갚자."

아닌 게 아니라 국채보상운동은 양반보다 평민, 장사치, 부인, 기생들에게 더 열렬히 환영받아 불과 서너 달 만에 전 국토를 휘저었다. 언론매체가 발달한 요즘으로서도 쉽게 납득하기 어렵다. 나라를 건진다는 의사(義士)적 정신 아래에 이런 흥미로운 대결이 깔려있었던 것이다. 몸에 해로운 끽연을 하고 여성을 구속하는 반지를 계속 낄텐가? 꺼져가는 조국을 구할 텐가?

국채보상운동은 지난해 안중근 의사 순국 100주년을 맞이해 의미가 한층 보태지는 것 같다. 안중근 의사는 의거 두 해 전에 평안도에서 '국채보상기성회'의 관서지부장을 맡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안중근은 자신의 부인에게 장신구를 전부 헌납하도록 한 후, 일반 대중에게 호소했다고 한다. 또한 안중근은 순국 직전에 표명한 자신의 '동양평화론'에서 한'중'일'러가 함께 어울려 평화를 유지할 수 있는 군대를 만들고 나아가 공동화폐 제조의 필요성까지 거론했다. 알려진 것처럼 그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것은 침략자에 대한 분노 때문만이 아니라 '동양 평화'의 균형을 깨뜨리려는 주역을 제거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말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안중근의 사상이 보다 심원했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그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기 전에 국채보상운동에 적극 참여한 까닭도 이 운동이 '동양평화론'과 결부되어 있다고 판단한 때문이 아닌가 추측된다.

국채보상운동은 세계 민중운동사에서도 희귀한 예이지만 안중근의 '동양평화론'과 더불어 입체감이 상당히 더해지는 것 같다. 종래의 자주자강이라는 민족운동에서 협력 혹은 평화운동으로 시점(視點)이 이동할 때 국채보상운동의 의미는 과거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절실히 가슴에 와닿는 것이 된다.

그런 점에서 국채보상운동은 현재 대구 정신의 푯대로 기릴 만하다. 물론 다른 몇 가지의 기념비적인 과거도 없지 않으나 국채보상운동의 독특한 발상과 전국적인 확장, 그리고 오늘날의 가치로 되짚어 볼 때 대구의 정체성을 환기시킬 만한 대표적인 역사(歷史)가 아닌가 싶다.

이제나마 대구에 이 운동의 기념관이 지어진다고 한다. 참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그동안 시일이 꽤 지체되었고 규모도 처음 작정한 것보다 왜소해졌다는 안타까운 보도가 있었지만 기념관을 건설하기로 결정한 대구시에 흔쾌한 박수를 보낸다. 없는 것을 새로 만드는 일은 항상 어렵지 않겠는가.

'담배와 가락지로 나라를 구한다'는 흥미롭고도 역동적인 상상력은 여전히 우리를 즐겁게 감동시킨다. 그리고 이 운동이 펼쳐보였던 비폭력 평화주의와 더 눈여겨보고 싶은 '동양평화론'까지 접하면서 대구에 이런 것이 있었구나, 놀라워한다. 내년 2011년 5월에 기념관이 준공된 후, 내부를 관람하고 나오는 시민 학생들의 표정을 미리 그렇게 상상해 보는 것이다.

소설가 엄창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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