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맛 향토음식의 산업화] (32) 예천 청포묵

8천원에 맛보는 16시간 '비취빛' 정성

'새야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간다'

동학혁명 때 녹두장군 전봉준의 죽음을 슬퍼하며 민초들이 부르던 노래다. 노랫말 속 청포는 녹두를 갈아서 만든 묵. 청명하다고 표현할 정도로 투명한 옥색 빛깔이 감도는 청포는 만드는 과정이 메밀묵과 비슷하지만 품격을 따진다면 엄청 차이가 난다. 맛도 맛이지만 고운 빛깔과 입안에서 느끼는 매끄러운 식감은 미식가가 아니더라도 탄성이 절로 나오게 한다. 몸집이 작고 단단해 녹두를 닮았다고 해서 녹두장군이라는 별명이 붙었다는 전봉준의 이야기와 당파싸움을 종식시키기 위해 청포에 나물고명을 얹은 탕평채(蕩平菜) 만찬을 벌인 조선 영조의 이야기 등 청포에 얽힌 스토리도 여럿이다. 전통음식 조리사들은 이 청포를 한식 세계화에 더 없이 좋은 품격 높은 우리 음식 소재로 추천하고 있다.

◆빛깔 좋은 청포묵 만드는법

"아유. 어서 오세요. 이방에 드시지요. 많이 춥죠? 여기 조금만 기다리고 계세요."

예천읍내에서 이렇게 친절한 식당도 있었나 의아할 정도로 친절하기 그지없는 예천 청포집 주인 양종례(49·예천읍 남본리 222-23)씨가 버선발로 달려나오듯 손님을 맞는다. 음식맛이 좀 소문 났다 싶으면 무뚝뚝한 게 보통이어서 그저 손님들이 섭섭함을 삭히고 마는 이 지방 식당가 풍경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다.

양씨의 시어머니인 이필선 할머니가 청포장수로 시작한 이래 2대째인 예천 청포집은 청포정식(8천원)과 탕평채(2만원)로 전국에 소문 나 있다. 국수처럼 가늘게 채를 쳐놓은 청포에다 당근, 미나리, 계란 흰자와 숙주나물, 김가루로 오색 고명을 얹은 청포정식은 참기름 양념 간장을 뿌리고 그냥 젓가락으로 저어주면 바로 먹음직스럽게 비벼진다. 함께 나오는 17가지의 반찬도 맛이 각양각색. 파와 양파, 양념고추장으로 무친 명태포무침과 파릇파릇한 삼동초 숙주나물, 당근·부추를 잘게 썰어넣고 노릇노릇 구워낸 녹두빈대떡 등 하나같이 맛깔스럽게 담아낸다. 무탕은 찬 성질의 청포묵과는 찰떡궁합이다. 뜨거워도 시원하다는 느낌이 실감나는 이 무탕은 무와 두부, 다시마를 들기름으로 볶다가 살짝 소금간을 하고 펄펄 끓여 손님상에 올린다. 술안주용인 탕평채는 고기를 빼고 나물고명만 살짝 얹은 퓨전형으로 낸다. 원래대로라면 섞어야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

"아이구 음식 배우느라 시어머니께 매일같이 혼났지요. 그렇게 배웠는데도 청포묵 쑤는 것은 아직도 어려워요."

양씨는 매일 오후 5시쯤 녹두를 물에 불리면서 다음날 장사를 준비한다. 맷돌로 곱게 간 녹두가루를 성긴 자루와 촘촘한 자루에 번갈아 넣고 모두 6번씩 녹두 앙금을 걸러내야 한다. 그래야 청포가 곱게 나올 뿐만 아니라 탱글탱글하고 쫄깃한 탄성도 갖기 때문에 이 작업에 가장 많은 공을 들인다고 한다. 앙금이 다 밭쳐져야만 그날 잠자리에 든다.

"불이 너무 세면 청포묵에서 화근내가 나 버리게 되지요."

양씨는 새벽 4시면 청포묵 쑤기를 시작한다. 입안에 사르르 미끄러지듯 하는 좋은 청포묵 만들기의 비법은 물 조절과 불 조절. 처음 묵 쑤기를 시작할 때 녹두 앙금량에 적절히 물을 맞추고 끓이다가 제때 불을 끄고 뜸을 들여야만 옥색 빛깔의 제대로 된 청포를 만들 수 있다고 한다. 녹두를 갈고 거르고 끓이고 식혀내 청포로 만들어 내는 데 모두 16시간이나 걸린다.

◆청포묵은 한식세계화 소재로 적격

청포묵도 여타 웰빙형 전통음식과 마찬가지로 만들기 시작해 먹을 때까지 오랜 시간과 정성이 드는 슬로푸드다. 체내에 쌓인 독소를 배출시켜 주고 고혈압과 당뇨병에 좋은 것으로 알려진 녹두의 한방적 효능을 설명하지 않더라도 청포묵은 소화가 잘 되고 기력회복에 이로운 건강식품으로 잘 알려져 있다. 농촌진흥청 한식세계화 농업연구관인 한귀정 박사는 "녹두는 녹말과 단백질 함량이 높아 영양가가 아주 높은 식품"이라며 "해독 해열 작용이 뛰어나며 종기나 피부병을 치료하는 약용으로도 쓰였다"고 말했다.

이처럼 몸에 좋은 청포묵은 비취색이 풍겨나는 독특한 빛깔이 장점으로 전통 음식상뿐만 아니라 퓨전 한식 상차림에 여러 가지로 응용할 수 있어 한식 세계화 소재로 가치가 높다는 평가다. 예전에는 채 썬 청포 한가닥을 놋젓가락으로 집어 미끄러운 참기름 간장에 찍은 후 흘리지 않고 입에 가져가도록 시켜 선비의 몸가짐이 어떠한지 알아보는 '인재선발용 면접 음식'으로 쓰였다고 하니 품격 높은 전통음식임에 틀림없다.

예천 청포집에서 하루 쓰는 청포묵은 두 판 8㎏이다. 이를 만드는 데 쓰이는 토종녹두는 일곱되 정도. 한 달에 스무 말 정도로 연간 쓰는 양이 스무 가마니에 이른다. 돈으로 환산하면 연간 3천만원 어치의 녹두를 쓴다. 예천 청포집에 토종녹두를 생산해 장날마다 납품하는 농민이 생길 정도라고 하니 농촌 소득증대에 기여하는 공도 크다.

한식세계화에 음식 소재로 활용할 수 있는 탕평채의 레시피는 이렇다. 고조리서를 기준하면 청포를 길이 4∼5 ㎝, 너비 1㎝, 두께 0.5㎝ 정도로 썰고, 숙주는 머리와 꼬리를 떼고 소금을 약간 넣고 데쳐 낸다. 미나리와 물쑥도 다듬어 소금물에 데쳐 내고, 쇠고기는 가늘게 채썰어 양념장에 재어 둔다. 달걀은 황백 지단을 갈라서 부쳐 채썰고 김은 구워서 채썰거나 잘게 부순다. 번철에 양념한 쇠고기를 바싹 볶아내고 물쑥과 미나리는 물기를 짜서 3~4㎝ 길이로 썬다. 넓은 그릇에 청포와 볶은 소고기·숙주·미나리·물쑥을 함께 넣고 초간장으로 고루 무쳐 접시에 담고 달걀지단, 김채, 실고추 등을 고명으로 얹는다. 양념간장은 간장·식초·설탕·깨소금·참기름을 섞어 만든다.

◆청포묵에 담긴 음식 스토리

청포에 담긴 가장 유명한 스토리는 녹두장군의 애닯고 뜻깊은 이야기다. 동학혁명을 일으킨 전봉준은 키가 작은 데다 상체와 하체의 굵기가 거의 비슷해 녹두처럼 야무지게 생겼다고 해서 녹두장군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어려서부터 담력이 세고 기백이 넘친 전봉준은 1894년 농민군을 이끌고 썩은 조정과 일본군에 맞서 싸워 한때 진주성을 점령하고 집강소를 통해 낡은 정치를 개혁하기도 했으나 공주 우금치에서 청일전쟁에서 이긴 일본군에게 대패했다. 새로운 세상을 만들려던 농민들의 꿈은 일본군에 의해 짓밟히고 결국 녹두장군 전봉준도 사로잡혀 목을 베이고 만다. 민초들은 이 안타까운 일을 파랑새 노래에 담아 부르면서 좋은 세상이 오기를 꿈꿨다고 하니 가슴이 아리다.

왕을 위한 수라간의 탕평채 음식 개발 이야기도 흥미롭다. 조선 영조 때 남인북인 노론소론 4색 당파 싸움이 극심하자 왕은 탕평책을 썼다. '왕은 인재를 가깝다고 쓰고, 멀다고 쓰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인재등용 원칙에서 나온 그때 음식이 바로 궁중음식인 탕평채다. 검은색의 김가루는 북인, 푸른색 미나리는 동인, 붉은색 소고기는 남인, 음식의 주재료인 청포는 서인을 상징했다. 영양이 넘쳐 병이 되는 요즘엔 소고기를 쓰지 않고 채소와 계란 고명만 얹은 담백한 탕평채가 더 인기다. 쇠고기와 청포묵을 섞어 만든 궁중요리 탕평채를 당시 서민들은 돼지고기와 메밀묵으로 바꿔 '태평초'라고 이름짓고 사철 만들어 먹었다.

향토음식산업화특별취재팀 최재수기자 biochoi@msnet.co.kr 김병구기자 kbg@msnet.co.kr 권동순기자 pinoky@msnet.co.kr 강병서기자 kbs@msnet.co.kr 엄재진기자 2000jin@msnet.co.kr 사진 프리랜서 강병두 pimnb1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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