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전태흥의 책과 예술] 공재 윤두서(박은순 지음/돌베개 펴냄/2만3천원)

극사실 묘사 자화상 통해, 시대의 좌절과 염원 표현

어린 시절 언제나 미술시간은 불편했다. 또래의 많은 아이들이 그랬던 것처럼 가난했던 나는 늘 준비물(크레파스와 도화지)을 가져가지 못했고 그 시간이면 교실 뒤편에서 때로는 무릎을 꿇고 앉아 있거나 동무들에게 양철 주전자에 물을 떠나르는 당번을 도맡아야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철부지 아들의 투정에 가슴 아팠던 어머니께서 공장이 쉬는 날 공사판에 나가 열 색깔 남짓한 크레파스를 사들고 학교로 오셨다. 아들은 벌을 서지 않아도 되는 미술시간을 기다렸지만 끝내 그 시간은 오지 않았다. 창가에 놓아둔 크레파스는 뜨거운 햇볕에 색을 알아볼 수 없게 녹아 버렸고 미술시간은 그렇게 학창시절에서 지워져 버렸다. 어린 시절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어쩌면 그렇게 사치스러운 것이 되고 말았다. 비록 나이가 들면서 그리지 못하는 것에 대한 보상은 듣는 것으로 바뀌었고 보는 것으로 만족하게 되었지만 아직도 여전히 그림은 불편하다. 그것은 아마도 빛바랜 기억 속에서도 아물지 못한 상처가 너무나 선명하기 때문이리라.

렘브란트(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1606~1669)와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1853~1890)의 공통점은 유난히 자화상을 많이 그렸다는 점이다. 자화상은 일찍이 그리스 화가들에 의해 시도되었고 예술가의 자아의식의 발달로 자기성찰을 통해 자기와 대면한 화가들이 자화상을 그리게 한 동기라 할 수 있다. 자화상은 모든 예술 작품이 그러하듯이 한 개인의 삶뿐만 아니라 그 시대를 산 인물을 투영한다는 점에서 미술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위치를 가진다. 단 한 점도 그리지 않은 화가도 있고 렘브란트나 고흐처럼 많은 자화상을 남긴 화가들도 있지만 단 한편의 자화상만으로 자신의 예술세계와 삶을 표현한 이도 있다. 자신을 그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1668~1715)의 자화상은 서화 예술에 사상과 철학을 대입시킴으로써 조선 후기를 빛낸 새로운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사실 평가야 어떻든 그의 자화상은 보는 이로 하여금 단 한순간도 눈을 뗄 수 없는 강렬하고도 진지한, 철학적 사유를 품게 만든다. 도대체 이런 그림을 그린 이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그는 어떤 연유로 이렇듯 당당하고 결연하게 세상을 뚫어보고 있을까? 당장이라도 종이를 뚫고 나올 것만 같은 눈을 가진 장수의 풍모이지만 그가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1587~1671)의 증손자였다는 사실에 이르면 선비의 그림이 가진 정교한 표현에 새삼 놀라게 된다.

『공재 윤두서』는 화가의 자화상을 통해서 그가 살아간 시대적 상황과 그가 가졌던 꿈과 열정, 그리고 좌절과 새로운 희망을 말하고 있다. '마음 고요하니 몸 또한 한가하네./ 낚시 줄 거두고 석양에 누우니/ 내 낚시 본래 곧은 것이라./ 강태공을 꿈꾸는 것 아니라네.'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자신의 꿈을 펼치지 못한 종손의 형형한 눈빛은 그의 시에서도 빛이 난다. 분노보다는 새로운 꿈을 꾸었던 그는 어쩌면 생전에 단 한점의 그림밖에 팔지 못했지만 오늘 이 순간 수많은 사람들의 별빛이 된 고흐처럼 빛나는 별일지 모른다. 자신에게 보다 정직한 삶만이 예술을 빛나게 하는 것이 아닐까.

여행작가 ㈜미래티엔씨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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