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동행-경북을 걷다](10)구미 옥성 주아리 숲길

'책보' 메고 넘던 싸리꽃 핀 길…호젓함에 차라리 눈물 겨워

바람이 나려나보다. 봄바람이 나려나보다. 발목까지 푹푹 잠기는 눈이 쌓인 숲길을 걸었던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부터 봄타령이라니. 지금은 3월이지만 오늘 소개할 주아리 숲길은 2월 초엽에 다녀왔다. 길을 떠날 때마다 추울까봐 걱정했는데 이날은 낮 기온이 10℃까지 올랐다. 그러니 봄바람이 날 수밖에. 구미시 선산읍 옥성면 주아리 숲길은 산림청이 2008년 펴낸 '행복으로 가는 길, 아름다운 임도 100선'에 당당히 이름을 올린 곳이다. 선산읍에서 33번 국도를 따라 낙동 쪽으로 가다 보면 59번 국도로 이어진다. 오른쪽으로 낙동강 풍광을 눈에 담고 잠시 달리면 이내 옥성면 소재지에 닿고, 여기서 '옥성자연휴양림'으로 가면 쉽게 찾을 수 있다.

휴양림에서 출발한 주아리 숲길은 선산읍을 감싸안 듯 내려앉은 비봉산 자락 임도다. 1986년부터 닦기 시작한 이곳 임도는 비봉산을 동서남북으로 나누며 18km나 이어진다. 굽이치는 모퉁이마다 색다른 경치를 보여주고 참나무, 오동나무, 소나무, 자작나무 등 다양한 식물 군락이 곳곳에 있어 산림욕에도 그만이다. 비봉산 북쪽에는 옥성면이, 남쪽에는 선산읍이 자리 잡고 있다. 오늘 가는 길은 옥성에서 출발해 숲길을 따라 남쪽으로 선산읍까지 가는 코스. 휴양림 안쪽으로 들어서면 저수지인 '주아지'를 담고 있는 거대한 제방이 눈에 들어오고, 주아지를 지나면 '옛오솔길'을 알리는 표지판이 보인다. 옥성면과 선산읍을 이어주는 산길이다. 비봉산을 옆으로 돌아드는 신작로가 놓이기 전, 옛 사람들이 5일장에 가고 학교를 다니기 위해 이 고갯길을 넘었다. 길 안내를 맡은 허남효 구미시 산림자원담당은 "얼추 한 시간 반 정도면 고개를 넘어 옥성 사람들이 선산에 갈 수 있었다"며 "지금은 흔적만 남았지만 버스도 없고 길도 험하던 수십년 전만 해도 이 길은 옥성과 선산을 이어주는 주요한 대목길이었다"고 했다. 책보퉁이를 싸들고, 등짐을 지고 저마다 꿈과 희망을 품고 오르내렸을 이 길. 서둘러 넘기 위해 가파른 길도 마다하지 않았으리라. 낙동강 위로 동녘 해가 떠오를 즈음, 삼삼오오 짝을 지은 아이들은 제법 머리가 굵은 동네 큰형을 따라 풀섶에 내린 이슬에 옷을 적시며 이곳을 지나 학교로 향했다. 하교 때라고 달랐을까. 일찍 학교를 파한 어린 아이들은 형들이 수업을 마칠 때까지 운동장에서 뛰어놀다가, 등교하던 모양새 그대로 고개를 넘어 집으로 향했다. 해는 어느덧 서산으로 뉘엿뉘엿 넘어가지만 소고삐를 부여잡고 꼴을 먹이러 가야했고, 다리가 제법 굵어진 아이들은 지게를 메고 나무를 하러 산을 다시 올라야 했다. 5일장이라도 되면, 동네는 떠들썩해졌다. 콩이며 산나물이며 바리바리 싸서는 등에 지고 머리에 이고 장터로 향했다. 지금 소풍 삼아 걷는 이 길은 바로 그들의 삶의 길이었고, 땀으로 다져진 길이었다.

숲길 곳곳에 표지판이 붙어있다. 선산읍 대신 서쪽으로 덕촌리로 빠질 수도 있고, 동쪽으로 초곡리로 내려설 수도 있다. 돌아오는 차편을 생각한다면 어디서든 길을 돌이키면 된다. 갔던 길을 되짚어오면 재미없다고 하지만 그것은 숲을 몰라서 하는 말이다. 혼자 걷는 숲길은 호젓함에 눈물 겨울 지경이고, 둘이 걷는 숲길은 두런두런 이야기에 시간을 잊게 된다. '옛오솔길'을 따라 오르면 구미에서 배출한 인재들의 이야기를 담은 안내판들을 볼 수 있다. 제법 가파른 길이지만 쉬엄쉬엄 읽으며 올라가면 산행의 재미가 더해진다.

비봉산(飛鳳山) 이야기를 해 보자. 구미시가 펴낸 '구미사람들과 함께 살아온 옛이야기'에 '봉황이 머무는 비봉산'편이 실려있다. '비봉산은 글자 그대로 봉황이 나는 형상이다. 봉황의 생김새는 닭의 머리, 뱀의 목, 제비의 턱, 거북의 등, 물고기의 꼬리 모양을 하고, 키는 6척가량이며, 성품이 어질고 청결하여 나는 새 가운데 왕으로 불린다. 오동나무가 아니면 깃들이지 아니하고, 대나무 열매가 아니면 먹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비봉산에는 오동나무가 곳곳에 있다. 워낙 빨리 자라는 덕택에 임도를 상하게 하기 때문에 많이 베어냈다지만 여전히 숲길 굽이마다 아름드리 오동나무를 볼 수 있다. 앞서 책에 따르면, 봉황이 동서로 양 날개를 펼치고 그 목이 남쪽인 선산읍으로 향하는데 봉황의 입이 옛 선산군청사(현 선산출장소)를 물고 있는 듯하다고 전한다. 아울러 '이런 산의 모양으로 봐서 '조선 인재의 반은 영남에서 나고, 영남 인재의 반은 선산에서 났다'는 옛말이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닌 것 같다'고 쓰여있다. 봉황에 얽힌 지명도 유난히 많다. 봉황이 날아갈까 염려해서 남쪽에 있는 고아읍 황당산에 그물을 친다는 뜻으로 마을 이름을 망장리(網障里)로 했고, 봉은 수컷이고 황은 암컷이기 때문에 동네 뒷산을 황산(凰山)이라 이름붙여 짝을 맞춰주었다. 읍내 옆 죽장리(竹杖里)에는 대나무를 심어 대나무 열매로 먹이를 대어주고, 화조리(花鳥里) 역시 봉황을 즐겁게 해준다는 의미이며, 영봉리(迎鳳里)는 봉황을 맞이한다는 뜻이고, 무래리(舞來里)는 봉황이 춤을 추며 날아오른다는 뜻이다. 선산 사람들의 비봉산 사랑은 참으로 끝이 없었다. 한편 임진왜란 당시 원군을 온 명나라 장수가 비봉산을 보고 인재가 많이 날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비봉산 주령 허리를 끊고 장작으로 불을 피운 뒤 큰 쇠못을 꽂았다는 이야기도 전해온다. 경상북도가 펴낸 '산과 숲, 나무에 얽힌 고향 이야기'에 나오는 대목이다. 하지만 앞서 구미시가 펴낸 '옛이야기' 책에는 임진왜란 때 선산까지 쳐들어온 왜군들이 산의 맥을 끊었다고 전하고 있다. 비봉산 지맥이 범상치 않았던 것은 틀림없는 모양이다.

다시 길로 돌아가자. 앞서 '옛오솔길'을 오르다보면 새로 닦은 임도와 만나게 된다. 임도를 따라 휴양림쪽으로 내려와도 되고, 반대로 형제봉(531m)로 올라갈 수도 있다. 임도를 따라 오르다보면 고개 정상을 만나고, 거기서 다시 갈림길이 시작된다. 한쪽으로는 형제봉, 반대쪽으로는 부처바위로 갈 수 있다. 선산읍으로 내려오는 숲길은 산의 남쪽 사면에 놓여있다. 조금 쌀쌀해도 날씨만 맑다면 상쾌하게 산책할 수 있는 곳. 경사가 완만하기 때문에 30분 정도 길을 따라 내려오다 다시 휴양림으로 돌아가도 전혀 무리가 없다. 중턱에 못미쳐 모롱이 끝에 커다란 바위 하나가 놓여있다. 소나무가 제법 자라 시야를 가리기는 하지만 그 곳에 서서 내려다보면 선산읍이 한눈에 들어온다. 구름이 잔뜩 낀데다 옅은 안개마저 걷히지 않아 뿌옇게 보인다. 하지만 사진처럼 또렷한 것보다 희뿌연 그 풍광은 신비스런 느낌마저 던지며 한 폭의 수묵화를 떠오르게 했다. 산은 높지 않았지만 길은 아름다웠고, 소담스런 그 멋에 긴 여운을 담고 있었다.

글·사진=김수용기자 ksy@msnet.co.kr

도움말=구미시 산림자원담당 허남효 054)450-5571

전시장소 협찬=대백프라자갤러리

모기홍 작-비봉산 모퉁이길

아스라이 사라지는 모퉁이 길이 신비감을 주는 동시에 왠지 서글픔이 드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마치 우리 인생을 보는 듯 하다. 저 모퉁이를 돌아서면 무언가 기다릴 것이라 기대하지만 결국 다른 모퉁이가 기다리고 있을 뿐. 작가 모기홍은 마치 안개 속에 휩싸인 듯 색채를 달리하며 뒤로 멀어져가는 산 능선을 절묘하게 그려낸다. 작가는 "비봉산 산길은 산세가 험하거나 빼어난 비경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걸을수록 재미를 더하는 묘한 매력이 있다"며 "모퉁이를 돌아서면 다른 산이 보이고, 그 뒤로 다시 모퉁이가 모습을 드러낸다"고 했다. 우리 삶도 그렇지 않을까. 무얼 그리 새롭고 다른 것이 있다고 이처럼 아둥바둥 사는 걸까. 그저 한 걸음 두 걸음 묵묵히 옮기다보면 어느새 고개를 넘고 산모롱이를 돌아설 것을. 끊어질 듯 이어지는 산길이 바로 힘겹게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이리라.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