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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진한 감동 '얼굴 없는 기부'…익명의 온정 확산

#.대구에서 육류 유통업체를 경영하는 A(55)씨는 얼굴도 모르는 B(17)양에게 매달 20만원의 장학금을 주고 있다. 우연히 B양의 어려운 사정을 알게 돼 기부를 시작한 A씨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B양의 아버지를 수소문해 전화통화를 한번 한 것이 전부다. A씨는 "성공하게 되면 어려운 사람들을 돕겠다는 다짐을 실천하고 있다"며 "이름이나 얼굴 공개는 폐가 될 뿐"이라고 했다.

#.C군 형제는 대구의 한 병원으로부터 매달 각 10만원씩 후원금을 받고 있다. 어디서 장학금이 나오는지는 알고 있지만 단 한 번도 병원 관계자를 만난 적이 없다. C군 형제는 "감사를 표하고 싶어 찾아뵙겠다고 했지만 병원 측에서 괜찮다고 했다"며 "부담을 느낄 것 같아 안 보려 하는 것일 뿐 개의치 말고 학업에 전념하라고 했다"고 전했다.

'얼굴 없는 기부' 문화가 우리 사회에 온기를 지피고 있다. 사진 촬영을 하며 전시성 기부가 주를 이루던 과거 모습과는 많이 달라지고 있는 것. 이런 추세는 온라인 뱅킹 등 대면 접촉 없이 후원할 수 있는 통로가 확보된 것도 요인이지만 기부 양태가 '전시성 행사'에서 '실질적 나눔'으로 바뀌고 있는 사회추세와도 무관치 않다.

얼굴 없는 기부는 연말이면 집중 모금에 들어가는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꾸준히 나타나고 있다. 매일신문의 '이웃사랑' 코너에도 매주 20여명씩 익명의 후원금이 들어오고 있다.

계좌 입금은 보내는 사람의 이름이 표시되는 게 원칙이지만 얼굴 없는 후원자들은 이름을 표시하지 않는 방법을 쓴다는 게 모금기관들의 전언이다.

2005년부터 최근 6년간 경북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접수된 익명 기부자는 매년 100명 안팎으로 금액은 1천500만원에서 3천만원에 이른다. 기부금액은 1만원부터 100만원까지 다양하지만 주로 소액 기부라는 게 모금회 측 설명.

모금회 최병삼 자원개발팀장은 "연말 정산 등 세제 혜택을 받기 위한 기명 기부가 대세지만 익명으로 보내는 이들이 꾸준하게 늘고 있다"고 말했다.

얼굴 없는 기부는 사춘기 학생들을 후원하는 경우가 많다. 사춘기 학생들은 감수성이 예민해 후원문제로 자존심을 상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32명의 학생에게 매달 560만원을 후원하고 있는 대구시 자치행정과 관계자는 "받는 사람의 입장에서 후원해야 한다"며 "온라인으로 후원금을 보내주고 주변 지인들에게 학생의 사정을 묻는 정도에 그쳐야 한다"고 말했다. 학생들은 정기적 후원에 오히려 부담을 느끼며 자칫 후원을 받는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상처라고 느낄 수 있다는 것.

포항에서 20년간 학생 30명의 학비와 급식비 등을 지원해온 D(55·여)씨도 자신의 이름을 끝내 밝히지 말아달라고 했다. 자신의 존재가 알려지면 지금은 성인이 된 후원 학생들이 심적 부담을 느낄 수 있고, 주변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질 것 같아 부담스럽다고 했다. D씨가 학생들을 후원한 것은 "내 아이와 비슷한 또래의 아이들을 도우면 결국 그 복이 내 아이에게 돌아갈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대한적십자사 경북지사 안윤식 회장은 "기부는 드러내놓고 해야 할 자랑스러운 일이지만 도움을 받는 사람에 대한 고민도 뒤따라야 한 단계 더 높은 기부 문화가 정착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태진기자 jiny@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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