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다시, 봄이다

허진호 감독의 영화 '봄날은 간다'에서 상우는 은수에게 말한다.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그 영화를 볼 당시 나는 20대였다. 그때 나는 순수남의 순정을 배신한 은수가 그렇게 미울 수가 없었다. 순수한 사랑의 감정을 현실 앞에서 여지없이 무너뜨리는 속물. 은수는 내게 그런 여자였다.

이제 내 나이 서른하고도 다섯을 훌쩍 넘긴 나이. 서른보다 마흔이 더 가까운 나이에 나는 다시 그 영화를 본다. 사랑이 현실임을 몸으로 깨달은 여자에게 남자의 그 말은 참 난감하다. 그렇다. 사랑의 열정이 지나간 자리엔 여지없이 현실이 남는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현실을 사랑이 식었다는 증거처럼 받아들인다. 사랑이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한다.

지금 만약 누군가 내게 그런 말을 한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해주고 싶다. 사랑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 아닐까 하고. 아마도 그 과정은 '사랑이 식었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만큼 많은 변화를 동반할 것이다. 더 이상 그 여자의 투정이 예뻐 보이지 않고, 더 이상 그 남자의 호기가 현실성 있어 보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내 사랑의 끝을 증명하는 거라 여긴다면 너무 섣부른 판단이 아닐까.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사랑은 과정이다. 서로의 장점이 단점처럼 여겨지고 더는 가슴 뛰는 순간이 없다고 해도 나는 여전히 그 사람을 신뢰한다. 그리고 그 사람은 내 일상을 든든하게 지탱해준다. 밉다, 싫다 해도 힘들 때 제일 먼저 생각나고, 기쁠 때 제일 먼저 떠오른다.

그 사람의 삶의 방식을 보려면 사랑의 방식을 보라는 말이 있다. 가슴 뛰던 순간이 지나가고, 덤덤해진 순간이 왔다고 해도 그 사람을 아끼고 사랑할 수 있다면, 아마 그 사람은 자신의 삶도 그렇게 할 수 있으리라. 지겹고 때론 벗어나고 싶은 일상을 그렇게 사랑하고 아끼며 살 수 있으리라.

다시 봄이다. 또 꽃이 필 것이다. 내 인생에도 사랑이 피고, 또 일상이 될 것이다. 그리고 때때로 지겨워질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안다. 세상의 모든 것이 다 변하듯 사랑 역시 변한다는 걸 말이다. 어제의 하늘과 오늘의 하늘이 다른 것처럼, 피부에 닿는 바람의 질감이 순간순간 바뀌는 것처럼 사랑도 변한다는 걸 말이다. 변하는 게 오히려 더 자연스러운 과정이라는 걸 이제 나는 인정한다. 그것이 '싫어졌음'의 뜻이 아니라 사랑의 과정임을, 그리고 내가 관계 속에서 성장하고 있음을.

전문주 방송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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