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일단 만들고 보자" 번지수 잘못 찾은 기념비들

대구시, 지리적 연관성 없는 엉뚱한 곳 세워

대구 서구 이현동 이현공원 끝자락에 있는
대구 서구 이현동 이현공원 끝자락에 있는 '6.25참전용사 명예선양비'. 건립 10년째를 맞고 있지만 아무도 모르는 잊혀진 기념비다. 정운철기자 woon@msnet.co.kr

2일 오후 대구 서구 이현동 이현공원 구석진 곳. '6.25참전용사 명예선양비'라는 비석이 덩그러니 서 있었다. 건립 10년째를 맞고 있지만 이 비석의 존재를 아는 시민은 드물다. 1천200만원을 들여 만든 이 비석은 전사자 320명과 무공수훈자 81명, 참전용사 443명 등 844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인근에 사는 여동일(36)씨는 "누군가 일궈놓은 텃밭 아래 비석이 방치돼 있는지도 몰랐다"고 했고 6·25전쟁 참전용사 이상태(86)씨는 "참전 용사 등 관계자들이 접근성이 좋은 구청 뒤로 옮겨달라고 몇 번이나 부탁을 한 것으로 안다"며 "기념비만 덜렁 세워놓으면 끝나는 것도 아닌데…"하며 입을 다물었다.

엉뚱한 자리에 들어선 기념탑·추모비가 시민들의 기억에서 잊혀지고 있다. 역사적 사건이나 운동이 일어나면 추모비 건립 주장이 제기되고 관련 기관은 일단 만들고 보자는 탁상행정이 '잊혀진 기념탑'을 양산하고 있는 것이다.

상인동 지하철 가스 폭발사고 희생자 위령비도 엉뚱한 곳(학산공원)에 있다. 안전 사고를 잊지 말자는 취지로 건립됐지만 시민 접근성을 간과했다. 시민들은 기념탑 위치조차 모르기 일쑤다. 위치와 상징성이 전혀 연결되지 않은 채 건립됐기 때문이다.

2·28 대구민주화운동 기념탑 역시 중구 명덕네거리에서 아무런 연관성이 없는 두류공원으로 옮겨졌다. 1962년 시민들의 성금으로 운동의 중심 지역(명덕네거리)에 들어선 기념탑은 1990년 로터리 체계가 네거리로 바뀌면서 두류공원으로 이전됐다. 현장과 괴리되면서 시민들 기억에서 잊혀지고 있는 것이다.

대구 북구 산격동 경북대 캠퍼스 정문에 들어서면 의병장의 기념탑이 눈에 띈다. 경북 예천 출신으로 1907년 의병을 규합해 활약하다 체포돼 순국한 장윤덕(1872~1907) 의사의 추모비다. 지나가던 학생들을 붙잡고 물었더니 한결같이 '전혀 몰랐다'고 답했다. 한 학생은 "수의대에서 실험한 동물을 위해 세운 동물 위령비인줄 알았다"고 했다.

학교 관계자는 "워낙 오래 전 일이라 왜 여기에 있는지 잘 모르겠다"며 "이전을 검토 중"이라고 말했다. 경북대는 2년 전부터 대구지방보훈청에 교외 이전에 대한 국비 지원 여부를 타진하고 있다.

이처럼 위치 선정이 잘못돼 기념탑·추모비가 잊혀져가는 우리와 달리 일본의 경우 위령비와 위령비가 세워진 장소를 공원으로 조성해 현장을 그대로 보존해 두고 있다. 1995년 고베 대지진의 잔재를 일부러 남겨 둔 고베 메리겐 파크 내 '메모리얼 파크'가 대표적 사례다. 고베는 일본 최고의 해안도시로, 최신식 현대건물을 자랑하지만 대지진 당시의 붕괴 구조물을 시민들의 발길이 잦은 곳에 그대로 보존해 시민들의 안전 의식을 일깨우고 있다. 김태진기자 jiny@msnet.co.kr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