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고무신? 고교 시절 삼국의 한강 유역 점령 순서를 외우기 위한 기억법이었다. 백제, 고구려, 신라 순으로 강을 차지했다는 뜻이다. 암기 학습의 한계 탓인지 이런 사실(史實)에서 별 감흥을 느끼지 못한다. 왜 한강이었을까? 한강의 지정학적 가치는? 이런 물음에 서가(書架)의 교육은 명쾌한 대답을 해 주지 못한다. 이럴 때 한강을 한눈에 굽어보는 산성에 오른다면? 자신이 사학자가 아니더라도 강의 지리'경제적 가치가 계량화될 것이고 군사전문가가 아니더라도 수로의 전략적 가치를 측량하게 될 것이다.
영월 태화산은 삼국이 강의 패권을 두고 다툰 남한강을 끼고 있는 산이다. 강의 지배권을 놓고 신라와 고구려는 170년간 전쟁을 벌였고 승자인 신라는 삼국을 통일했다. '한강을 얻는 자 한반도를 지배하리라' 라는 예언처럼. '바보청년의 벼락출세기'로 알려져 있는 온달 장군이 화려하게 역사 무대에 등장하는 곳도 바로 이곳이다.
◆영월'단양 경계, 100대 명산 랭크
태화산은 영월군 영월읍과 충북 단양군 영춘면의 경계를 이루는 산. 어라연을 휘돌아 나온 남한강의 옥빛 물색이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운 곳이다. 북동쪽 강상류에는 4억년의 신비를 간직한 고씨동굴이 있고 청령포엔 단종이 유배되었다가 묻힌 장릉(莊陵)이 있다.
치악산, 소백산, 월악산, 금수산 등 주변의 국립'도립공원급 산들에 밀려 산꾼들에게 다소 소외되었다가 2002년 '세계 산의 해'를 맞이해 산림청이 선정한 100대 명산에 랭크되면서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소백, 월악이 웅장한 능선과 기암괴석으로 관광객들을 불러 모은다면 태화산은 태고의 자연미를 찾아 호젓하게 산행을 즐기려는 마니아들을 유혹하고 있다.
대구권에서 온 등산객들은 영월 흥월리 큰골 입구 속칭 오그란이 마을 쪽을 등산 기점으로 잡는다. 중앙고속도로에서 진입이 쉽고 정상에 오른 후 고씨동굴이나 북벽 쪽으로 종주하기가 수월하기 때문이다.
가이드는 "몇 해 전만 하더라도 이런 오지산은 모객이 안돼 진행이 힘들었는데 요즘은 한적한 산을 찾는 마니아들이 부쩍 늘어났다"고 말한다. 아마도 50~70대 명산들을 일순(一巡) 한 산꾼들이 이제 오지산행으로 눈을 돌렸기 때문일 것이다.
◆최고의 망루 '태화산성'
취재팀은 오그란이를 출발, 절골계곡으로 접어든다. 어느덧 봄빛이 완연하다. 길가 조릿대는 제법 초록 채도를 높였고 계곡가 버들강아지도 하얀 솜털을 한껏 부풀렸다. 옛 태화사 터를 지나 취재팀은 산성터를 향해 오른다. 산길엔 낙엽들이 겨우내 제 몸을 덮었던 눈을 털어내고 푹신한 카펫 길을 만들었다. 하지만 응달엔 아직도 눈이 쌓여 있고 빙판까지 져 여기저기서 실족한 등산객들의 비명이 계곡을 울린다.
드디어 산성 터. 눈앞이 트이며 발 아래로 시원한 조망이 펼쳐진다. 흐릿한 연무 사이로 영월 시가지가 파스텔톤으로 펼쳐지고, 시가지를 돌아나온 남한강이 논밭 사이를 낮게 흐르고 있다. 굽이쳐 흐르는 강의 위용은 마치 거친 붓으로 터치한 묵선(墨線)을 보는 듯하다.
태화산성은 고도 900m 능선에 둘레가 1㎞ 남짓한 규모로 성 내부에 골짜기를 포용하고 있는 포곡식(包谷式) 형태다. 1천500년의 세월에 쓸린 성벽은 거의 허물어져 망대의 흔적만 남아있다. 태화산성은 사방 백리 안에 달구지 움직임까지 관찰될 정도로 망루로서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영월의 대야산성, 정양산성, 단양의 영춘산성 등이 삼국시대 실전(實戰)용이라면 태화산성은 적성(敵城)을 감시하고 적의 동태를 감시해 아군에게 전달하는 사령탑의 기능을 했다고 한다. 바로 인근의 영춘은 신라와 고구려가 한강의 패권을 다투던 격전지였다. 온달 장군도 바로 영춘면의 온달산성에서 신라군에 맞서 싸우다 성벽 아래서 화살을 맞고 전사했다.
삼국이 패권을 다툴 때 한강은 세력 판도의 균형추 역할을 했다. 강은 군사적으로 자연적인 해자(垓字)일 뿐 아니라 배수진, 수공(水攻) 등 군사적 활용도가 높고 무엇보다도 강 유역의 기름진 토지는 든든한 국부(國富)의 기초가 된다.
성곽에 올라서면 1천500년 전 고구려, 신라 군사들의 함성과 포성의 울림이 그대로 느껴진다. 저 강을 자욱하게 덮었을 돌과 화살과 옥빛 강물을 따라 흘렀던 선혈'''. 비경과 전쟁의 부조화를 생각하며 취재팀은 태화산 정상으로 향한다. 1시간 남짓한 능선 길, 강의 유려한 곡선은 계속 일행을 따라붙으며 시야를 간지른다.
◆군마들의 도강 소리 들리는 듯
태화산 정상은 충북과 강원을 가르는 경계 지점. 두 자치단체가 산을 공유해서인지 곳곳에서 이기(利己)의 흔적이 눈을 거스른다. 각 자치단체 홈페이지의 등산로는 자기 군(郡) 위주로 표시되었고 홍보도 자기 군 일색이다. 두 자치단체의 알력은 급기야 정상석을 같은 자리에 나란히 세워 놓는 추태를 보이기까지 한다.
정상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북벽쪽 하산 길로 들어선다. 잎을 떨군 신갈나무 수림을 따라 하염없이 걷다 보면 화장암 입구에서 거침없이 뻗은 편백나무 숲과 만난다. 화장암은 암자 간판을 달았지만 개가 짓고 닭과 오리가 마당을 뛰어다니는 반농반사(半農半寺)의 산골 사찰이다. 스님도 안마당을 드나드는 관광객들이 못마땅한 듯 묻는 말에 대답도 건성이다.
화장암을 빠져나오자 울창한 송림이 앞길을 연다. 하산길의 피로와 여독을 솔바람에 날려 보내노라면 어느덧 하산 종점 북벽 강가에 이른다. 석양에 비낀 남한강이 투명한 노을빛에 제 몸을 섞고 봄기운을 머금은 바람 사이로 강의 흐름이 평온하다. 잔잔한 물소리를 따라 병장기를 가득 실은 군마들의 요란한 도강(渡江) 소리가 오버랩된다.
글'사진 한상갑기자 arira6@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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