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8년 개띠해, 경북 문경읍내 남씨 집안에 장남 경읍(배우)이가 태어났습니다. 이후 두세 살 터울로 둘째 경춘(사진작가), 셋째 경주(1964년생·뮤지컬 배우), 넷째 경도(건축가), 막내인 딸 경훈(스튜어디스)이가 차례로 세상의 빛을 봤습니다. 다섯 남매의 아버지는 방랑벽이 있어 가정을 뒤로한 채 시를 짓고, 글을 쓰며 전국을 유랑했습니다.
자연히 가장 역할은 장남 경읍이의 몫이었습니다. 어머니와 함께 동생들을 키워야 하는 형편이라 파자마 차림에 포대기를 매고(동생을 업고) 학교에 다녔습니다. 선생님이 어머니에게 "제발 경읍이 포대기 매고 학교 오게 하지 말라"고 부탁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가정에 무책임했지만 그 끼를 자식들이 물려받았는지, 다섯 남매 모두 각자 위치에서 빛을 발하며 우애 좋게 잘 살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10년 전 간경화에 걸린 채 집안에 들어왔습니다. 한달 만에 장례식을 치렀습니다. 그야말로 바람처럼 살다가 바람처럼 하늘나라로 가버린 아버지입니다."(경읍)》
3일 서울 예술의 전당 자유소극장에서 열린 연극 '레인맨'(Rain Man) 공연을 2시간 앞두고 이 집안의 두 형제이자 연극의 주인공인 남경읍·경주 형제를 만났다. 뮤지컬 '사랑은 비를 타고' 공연 이후 14년 만에 같은 무대에 선 형제의 진한 우애와 프로정신으로 똘똘 뭉친 각자의 연기세계를 잠시 들여다봤다.
◆'아! 경읍이 동생'→'아! 경주 형님'
세월의 변화가 무섭다. 1980년대만 해도 뮤지컬계에서는 경주씨를 만나면 "아! 경읍이 동생 경주구나"라는 말이 통용됐다. 1990년대 초가 되자 역전됐다. 톱스타 반열에 오른 동생 때문에 경읍씨를 만난 사람들이 "아! 경주 형님 되세요"라는 말을 던지는 상황이 된 것.
동생 경주씨는 "20년 전 뮤지컬 활성화를 위해 스타를 띄워야 한다는 분위기가 있었는데 제가 운좋게 그 스타가 됐다"고 겸손해하자, 형 경읍씨는 "그런 측면도 있었지만 당시에 동생보다 더 열정적으로 뮤지컬을 한 사람은 드물었다"며 동생을 추켜세웠다.
변한 건 또 있다. 동생의 연기가 무르익으면서 연기를 두고 격의 없이 토론하는 분위기가 생긴 것. 경읍씨는 "14년 전에 함께했던 '사랑은 비를 타고'에서는 동생이 '형 이렇게 좀 해 봐'라고 하는 말에 자존심이 상하고 듣기 거슬렸는데 이젠 바뀌었다"며 "피를 나눈 형제니까 남들이 하기 어려워하는 말도 나를 위해 해 준다고 생각하자 진심으로 받아들이게 됐다"고 했다.
동생이 형에게 대드는 '사건'이 발생한 것도 당시 공연 때다. 공연을 앞두고 분장실 앞에서 언성을 높이고 말다툼이 벌어졌고, 자기 분을 이기지 못한 동생이 휴대폰을 집어던지고 말았다. 전형적인 경상도 사나이인 형은 난생 처음 벌어진 일인데도 대범하게 넘겼다.
경주씨가 "이젠 싸울 일 없죠. 제가 형한테 얼마나 잘하는데요. 돈도 빌려주고 그냥 주기도 하고 그래요"라고 너스레를 떨자 경읍씨가 "야! 나는 너 어릴 때 용돈도 주고 온갖 걸 다 해줬는데. 그걸 자랑이라고 하냐"며 맞받았다.
◆'경읍 선생님' VS '경주 학생'
경읍씨는 후배들을 가르치는 데 남다른 열정을 품고 있다. 동생 경주씨가 뮤지컬에 입문하는 길을 터준 것도 그다. 계원예고에서 20년 넘게 연기를 가르치고 있으며, 5년 전에는 '남뮤지컬 아카데미'를 열어 후진 양성에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다. 그의 강의를 듣고 문화예술계에 몸담은 제자만 2천명 이상이다.
각종 시상식의 수상소감에 경읍씨가 자주 오르내리는 것도 그 덕이다. 공연하는 뮤지컬마다 대박을 터뜨려 뮤지컬계에서 '미다스의 손'으로 불리는 조승우씨는 특히 자주 경읍씨를 언급한다. 경읍씨는 "계원예고 시절 눈에 띈 학생 조승우에게 'X발놈 정신'을 특별히 강조했다"며 "남자에게 필요한 오기, 근성, 한번 하면 뿌리를 뽑는 그런 열정을 주문했는데 잘 따라준 것 같아 고마울 뿐"이라고 했다. "실제로 조승우는 뛰어든 영화, 뮤지컬마다 독기를 품은 덕분에 톱스타 반열에 올랐다"고 그는 설명했다.
반면 현장 활동에 비중을 두는 경주씨는 아직 남을 가르치기보다 자기 공부에 더 열심이다. 지난달에는 서울예술대학 전공심화과정을 끝내고 졸업장을 받기도 했다.
경주씨는 "전 아직 가르치는 일보다는 더 많은 무대에서 열정을 쏟아내고 싶다"며 "이론보다 현실에서 더 혹독하고 힘든 과정을 겪어 더 좋은 작품으로 관객들을 만날 것"이라고 다짐했다.
◆다음달 대구공연 "기대해도 좋아"
경읍씨는 동생과 함께 무대에 설 '레인맨' 대구공연을 소개하며, 다음달 7일부터 11일까지 대구 봉산문화회관으로 오라고 했다. 그는 대구공연에 대해 "웃음과 진한 감동, 눈물을 기대해도 좋다"고 자신있게 말했다. 대구에 자주 오지 못한다는 그는 이번 공연에 꼭 왔으면 하는 사람으로 친구 강무효, 후배 박해빈 등 여러 사람을 꼽으며 "고향 가는 기분이라 마음이 설렌다"고 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문경을 떠나 경상도 기질이 좀 부족하다고 스스로 털어놓는 경주씨도 "대구 가서 생고기와 막창 먹을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군침이 돈다"며 장단을 맞췄다.
14년 만에 형제가 같은 무대에 선 올해는 경읍씨가 데뷔한 지 30주년이 된다. 경주씨는 "형의 데뷔 40주년, 50주년 무대도 함께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번 공연을 간단히 홍보한다면…" 하고 물었더니 형제는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편하게 친구, 연인, 가족과 함께 볼 수 있는 'Beautiful Story, Rain Man!'"
권성훈기자 cdrom@msnet.co.kr
사진·프리랜서 장기훈 zkhaniel@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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