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즐거운 책읽기] 내 딸이 여자가 될 때

청소년기 소녀들의 자아를 지키기 위한 투쟁

●내 딸이 여자가 될 때 (메리 파이퍼 /문학동네)

어린 시절부터 의식과 생활을 크게 규정해 온 가족으로부터 정서적으로 독립하여 사회로 나아갈 준비를 하는 10대, 그 중에서도 소녀의 어려움과 고통에 대한 책을 읽었다.

미국의 심리치료사 메리 파이퍼의 '내 딸이 여자가 될 때'라는 책이다. 미국에서 다양한 가정적 배경을 갖고 자라는 소녀들의 이야기다. 거식증 같은 섭식장애에 걸린 소녀에서 지속적인 성폭력에 노출된 소녀까지 참으로 다양한 소녀들의 삶이 사례별로 펼쳐진다. 이 책에 나오는 소녀들은 어떤 측면에서든 시행착오를 겪고 고통에 빠져 있다.

그 생생한 현장이 신선하면서도, 나의 10대 시절이 생각나서 마음이 아프기도 했다. 십대의 딸을 키우는 부모의 입장에서 지나간 일로 치부해버리기 힘든 문제이기도 하다. 미국에서는 중학생이라고 하지만 우리나라로 치면 중'고등학생에 해당될 듯하다. 내가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70년대 말과 80년대 초는 교복과 두발의 자율화가 막 실시되던 시기로, 남녀공학인 학교는 거의 없었다.

또 미국과는 달리 약물이나 알코올, 담배, 섹스 등의 문제가 그렇게 심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소녀가 여자가 되는 데는 많은 고통이 따랐다. 일부 소녀는 자신의 재능을 감추거나 포기한 채 여자가 돼야 했다. 중'고등학생 시절 나는 자신의 정체성뿐 아니라, 삶과 사회에 대한 의문과 막연한 두려움으로 혼란스러웠고, 정숙함과 순종을 강조하는 학교 분위기에 질식할 듯 갑갑함을 느꼈다.

10대에 소녀들은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가기 위한 탐색을 시작하지만, 사회는 그들에게 "얌전히 잘 있다가 좋은 남자 만나서 시집 잘 가면 된다"거나 "여자는 너무 똑똑해도 안 되고 얼굴만 예쁘면 된다"며 기를 죽이고 거짓 환상을 불어넣는다. 남학생에게는 더 크고 넓은 세계로 나가기 위해 준비하도록 격려하지만, 여학생은 모범으로 삼아야 할 인물의 수도 적고 분야도 제한돼 있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며 미국에서 딸을 키울 때는 우리나라와 또 다른 어려운 문제들에 부닥치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여성을 상품화하고 성적으로 대상화하는 성문화와 대중매체의 부정적인 영향력이 더 크고, 약물과 알코올에 노출된 사회 분위기 속에서 딸을 키우려면 얼마나 힘들 것인지 상상이 된다. 아이를 하나 키우려면 마을 전체가 필요하다고 했는데, 폭력과 섹스가 만연한 적대적이고 고립된 대도시에서 아이들이 무엇을 보고 자라기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인가?

한편 이 책을 읽으며 다행스럽다고 느껴지는 점도 있었다. 때로는 억압으로 작용하기도 하지만, 가족 간의 긴밀한 유대와 애착이 청소년기를 견뎌내고 건강한 어른으로 자라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는 사실이다. 베트남에서 이주한 소녀나 흑인, 히스패닉 소녀가 대가족 속에서 정서적 안정과 도움을 받는 사례를 보면서, 문제도 많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가족제도가 갖고 있는 긍정적인 면을 느낄 수 있었다.

풍족한 사회로 알려져 있는 미국사회의 이면에 홈리스나 이민자 집단 같은 극빈층이 그토록 많으며, 약자와 여성에 대한 멸시와 천대가 심하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기도 했다. 절벽에서 떨어지는 사람들을 구조하는 앰뷸런스의 역할을 하는 심리치료사로서 자신의 역할에 한계를 느끼고 사회문화를 변화시키는 데 나서야 한다는 메리 파이퍼의 말에 박수를 보내기도 했다.

요즘은 내가 자랄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여러 분야에서 여성들의 활동과 능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보이지 않는 유리벽에 갇혀 힘들어하는 여성들이 많을 것이다.

이 땅의 소녀들이 조금이라도 덜 상처받으며 자신이 가진 재능과 성품을 활짝 꽃피울 수 있는 날이 하루라도 빨리 오기를 기대한다.

신남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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