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가 내린다. 봄이 오는 소리가 비에 실려오나 보다. 봄은 빛깔로 오는 게 아니라 이렇게 소리로 오는구나. 갑자기 눈앞에 안개가 자욱하게 깔린다. 빗소리가 풍경도 불러오나 보네. 우후산경(雨後 山景). 비 온 뒤의 산안개가 산자락을 덮고 있다. 이건 순전히 나의 상상력이 빚어낸 봄 풍경 소묘지만 아늑하고 평화롭다.
##봄날 무료함을 달래던 배추 뿌리
어릴 적 고향의 봄은 짚동 사이로 내리쬐는 따사로운 햇살의 강도로 쉽게 느낄 수 있었다. 봄바람이 약간씩 불어도 부엌 옆 내 자리는 바람을 타지 않는 명당이다. 하교 후 집으로 돌아오면 아무도 없다. 오로지 눈부신 봄 햇살만이 어깨를 어루만지며 같이 놀자고 보챈다.
아무것도 할 일이 없다. 너무 심심하다. 이럴 때 강아지라도 한 마리 있으면 좋으련만 우리 집에서는 애완동물을 키울 만큼 여유가 없다. 어머니는 곧잘 "딸아이 중의 하나가 범띠이기 때문에 우리 집에서는 개가 잘 크지 못한다"는 옹색한 이유를 대기도 했지만 그 말이 거짓말이란 걸 나는 안다. 사람 먹을 밥도 모자라는 판에 개밥까지 주다니.
코를 후벼 코딱지로 좁쌀만한 공을 만들어 퉁기니 어디로 날아갔는지 보이질 않는다. 권태가 성숙하면 나태가 된다. "에이 씨…." 뭔가 재미있는 일이 없을까 하고 사방을 두리번거린다. 뱃속에서 쪼르륵 소리가 난다. 머릿속에는 콩을 구웠다가 감자를 삶았다가 온갖 생각이 다 일고 있다. 아차! 궁하면 통한다더니 묘수가 떠올랐다.
아침 조회 시간에 선생님이 하신 말씀이 생각난다.
"밭둑에 있는 무나 배추 뿌리를 뽑아 씻지도 아니하고 흙만 털어 먹는 경우가 있는데 조심해야 한다. 흙속 인분에는 온갖 기생충이 들어 있으니 특히 주의해라. 알겠제." "예."
시험을 칠 땐 선생님의 말씀이 전혀 생각나지 않았는데 이렇게 무료하고 텅 빈 오후의 햇살 속에서 선생님의 음성이 똑똑하게 들리니 나도 모범생에 가까운 모양이다.
옳지, 됐다. 학생은 모름지기 선생님이 가르쳐주신 것을 바탕으로 창의력을 발휘해야 한다. 그러면 그렇지, 담 밑 무 구덩이를 파고 지난가을에 봄날 군것질거리로 넣어둔 배추 뿌리를 끄집어내는 거다. 권태에서 출발한 나태가 근면으로 이어져 바로 실행으로 들어간다. 어머니가 뭐라시면 "배추 뿌리는 봄날 땡볕에 말려 새들새들 곯아야 맛있다는 걸 잘 아시잖아요"란 방패막이 대답까지 준비해 두었다.
##무맛과는 다르게 입맛 사로잡아
구덩이 속에 들어 있는 배추 뿌리는 짚소쿠리에 가득 담고도 남았다. 또래들이 얼음판 위에서 신나게 돌리던 큰 팽이만한 뿌리도 여러 개가 나왔다. 선생님의 말씀대로 깨끗하게 씻은 다음 껍질을 대충 벗겨 아작아작 씹어 먹었다. 무맛과는 전혀 다른 달짝지근한 감칠맛이 입맛을 사로잡았다.
봄이 무르익을 때쯤이면 학교에서 회충 퇴치약인 산토닌을 나눠 주었다. 어떤 해는 산토닌 지급이 늦어지는 바람에 얼굴색이 노랗게 횟배를 앓는 아이들이 늘어났다. 학교 변소에 들어가 보면 바닥에 회충덩이가 꿈틀대는 광경을 쉽게 목격할 수 있었다. 그 당시 고향의 아낙들이 바람을 피우다 들킨 남정네의 뒤통수에 대고 퍼붓는 소리가 '횟배 줄 똥을 살 놈'이었다.
요즘 시장에 가면 난전 할머니들이 배추 뿌리를 팔고 있다. 어릴 적에는 볼 수 없었던 엄청 큰 것들이 붉은 플라스틱 그릇에 놓여 있다. 맛이 옛날 것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꿩 대신 닭이란 말처럼 그런대로 괜찮은 편이다. 배추 뿌리 씹는 맛에 봄날은 간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지 않아도 그래도 봄날은 간다.
수필가 9hwa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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