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1년 1월, 압록강 칼바람을 가로지르는 사람들이 있었다.
잃은 나라를 찾으려고 내 나라를 떠나는 길이었다. 그 대열에 안동 문화권 인물들이 대거 나선 것이다. 독립군 기지를 세우자고 신민회와 약속했던 땅은 중국 만주의 유하현 삼원포, 세 갈래 물이 합치는 곳이다.
그 선두에 선 백하(白下) 김대락(金大洛)은 안동 임하면 천전리 내앞마을 출신이다. 66세라는 나이에 결코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더구나 가진 재산도, 누리는 신분도 모두 남부럽지 않은 처지가 아니더냐. 그러나 그는 나라 찾는 일에 모든 것을 걸었다. 내앞마을 친척들을 이끌고 가는 행렬에는 만삭이 된 손부와 손녀도 있었다. 그의 망명일기인 '백하일기'는 그 고난의 길을 소상하게 말해주고 있다.
1910년 음력 12월 24일, 고향을 떠난 일행은 걸어서 김천으로 갔다. 일주일이나 걸리는 여정이었다. 경부선을 타고 서울에 도착한 뒤 열흘을 머물렀다. 그러다가 1월 6일 아침 9시, 일행은 남대문역(지금의 서울역)을 떠나 의주로 향했다. 그날 저녁 8시가 되어서야 신의주에 30여리 못 미친 백마역에 내려, 객점에서 뒤늦은 식사를 마쳤다. 일제의 감시를 의식한 때문이다. 이튿날 1월 7일, 일행은 백마역에서 걷기 시작해 신의주를 향했다.
압록강을 건너 안동현(지금의 단동)에 도착한 날은 1월 8일, 생전 처음 겪는 만주의 추위는 견디기 힘든 고통 그 자체였다. 영하 30도를 밑도는 날씨는 상상했던 것보다 견디기 힘든 것이었다. 66세 노인 김대락은 말할 것도 없지만 산달을 맞은 임부까지 동반한 터라 여정은 어렵고 더뎠다. 오죽하면 날씨가 왜놈보다 더 독하다 말했겠나.
1월 11일, 이들은 마차를 빌렸다. 그렇다고 쉬운 게 아니다. 회인현 항도촌으로 가는 동안 마차에서 하는 일은 발을 얼지 않도록 종일 주무르는 것이었다. 아무리 버선을 많이 신고 바닥에 솜을 넣어도 감각을 잃어가는 발을 어찌하기 힘들었다. 안동현에서 항도촌 가는 540여리의 길은 고난의 연속일 수밖에. 새벽에 빈 입으로 출발해 정오가 되어서야 겨우 식사를 했고, 눈보라 속을 내달렸다. 그러니 모두들 고열과 두통은 피할 길이 없었다.
1월 15일 항도촌에 도착한 뒤 가던 길을 멈추었다. 약속된 삼원포의 땅과 집을 마련하는 동안 극심한 추위를 넘기기 위한 것이다. 황만영이 이끄는 울진 평해 사동마을의 평해 황씨 사람들이 미리 자리 잡고 있었고, 2월 5일에는 이상룡을 비롯한 안동의 고성 이씨 문중이 도착했다. 황씨 문중은 김대락의 사돈 집안이고, 이상룡은 매부다. 석 달가량 항도촌에 머무는 동안 김대락의 손부와 손녀가 아이를 낳았다. 안채와 사랑채가 따로 있는 형편도 아니니 바깥에서 순산을 빌던 시어머니는 온통 얼어버렸다. 그런 속에서도 김대락은 증손자와 외증손자가 '적의 땅'에서 태어나지 않음을 다행스레 여겼다.
4월 18일 삼원포 이도구에 도착, 여정은 끝났다. 고향을 떠난 지 거의 넉 달 만에 망명지에 발을 디딘 것이다. 망명길 자체가 고난이었지만 그것은 시작에 지나지 않았다. 1915년 삶을 마감할 때까지 뿌린 김대락의 피와 땀은 만주 독립운동사의 뿌리가 되었다.
강윤정 안동독립운동기념관 학예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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