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 이황의 발자취를 따라 걷는 '퇴계 예던길'은 엉뚱하게도 1천원 짜리 지폐에서 시작했다. 새 천원권 지폐 뒷면에 그려진 겸재 정선의 '계상정거도'. 위작 논란이 일기도 했지만 판단은 미술사가들에게 일단 맡겨두자. 퇴계는 화폐 인물 중 유일하게 앞·뒷면에 모두 등장한다. 파격적인 대우랄 수도 있는 대목. 퇴계는 뒷면 그림 속에 있는 서당에 앉아 조용히 책을 읽고 있다. 이 서당은 도산서원으로 확장되기 전의 '도산서당' 모습이라는 주장과 퇴계 종택 옆에 있는 '계상서당'이라는 주장이 부딪혀 논란을 빚었다. 그림 아래 흐르는 낙동강을 따라 윗쪽으로 바라보면 병풍처럼 둘러싼 산줄기를 볼 수 있다. 이곳부터 찾아보기로 했다. 도산서원 주차장에 이르면 누구나 입장권을 끊고 바로 서원으로 길을 잡는다. 이번에는 조금 달리 길을 시작해 보자. 매표소 오른편에 낙동강변으로 내려가는 길이 있다. 길 끝에 서면 퇴계의 학덕을 추모하며 특별히 영남 인재를 따로 뽑기 위해 과거시험을 치렀다는 시사단(試士壇)이 강 건너편에 보인다. 강을 따라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그림 속에 등장하는 물줄기와 산능선이 확연히 드러남을 알 수 있다.
물이 말라 강바닥이 거의 드러나다 보니 다리를 건너 시사단에 오를 수도 있다. 바꿔 말하면 배가 다닐 수 없다는 뜻. 안동호에는 안동임하호 수운관리사무소에서 운영하는 배들이 승객과 차를 실어나른다. 도산서원 아랫쪽에도 배를 타는 선착장이 있다. '경북 제703호'가 도산서원-의촌-토계-원천을 운항했다. 요금도 싸다. 어린이 100원, 어른 300원. 하루 세 차례 30분 걸려 물길을 오갔지만, 지금은 바싹 말라버린 잡초만이 선착장을 가득 메웠다. 수운관리사무소 관계자는 "다른 곳은 얼음이 얼어서 못다닐 뿐 3월부터 대개 운항을 시작하지만 도산서원에서 출발하는 703호는 수위가 낮은 탓에 지난해 한번도 운항하지 못했다"며 "올해도 운항여부를 장담할 수 없고, 댐이 만수위가 돼 봐야 알 수 있다"고 했다. 도산서원에서 배를 타고 낙동강을 거슬러 원천에 닿을 수 있는 날이 언제쯤 올까?
도산서원은 워낙 유명하다보니 이번 동행 길에선 생략하기로 했다. 대신 서원 뒤편 도산(陶山)을 넘어 퇴계종택 쪽으로 길을 잡았다. 매표소 주차장에서 '이육사 문학관'으로 향하는 북편 길을 따라 250m쯤 가면 오른쪽으로 난 임도를 만날 수 있다. 콘크리트로 온통 길을 덮어버린 탓에 산길을 걷는 호젓함을 망쳐버렸다. 다만 찾는 사람이 드물기 때문에 퇴계의 발자취를 더듬으며 조용히 사색하기에는 안성맞춤이다. 임도 구간은 약 2km. 오르막을 감안해도 30분 남짓이면 산 너머 퇴계종택에 닿을 수 있다. 길을 찾았을 때는 2월 하순으로 접어들 무렵. 설 전에 내린 눈이 하나도 녹지않은 길에는 사람 발자국 하나 없다. 인기척 없는 산은 동물들이 주인이다. 산토끼와 고라니가 뛰어다닌 발자국이 사방에 흩어져있다. 난데없는 사람 소리에 놀란 다람쥐 한 마리가 나무에서 쪼르르 내려오다 말고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가만히 웅크리고 있다. 적막한 산에 들이닥친 불청객 때문에 꽤 놀란 눈치다. 괜스레 미안한 마음마저 든다.
오늘 길 안내는 성균관 청년유도회중앙회 이동수(철학박사) 회장이 맡아주었다. 퇴계 선생의 후손인 이 회장은 안동 일대에 선현들의 발자취가 남은 길들을 20개 구간으로 묶어 '안동 예던길'을 만들었다. 오늘 동행에 나선 길도 그 구간 중 하나. 산길 양 옆으로 아름드리 오동나무가 눈에 띈다. 이 회장은 "예로부터 성현이 나타나면 봉황이 깃든다고 믿었는데, 봉황은 오동나무에만 앉았다고 전해진다"며 "산길 곳곳에 오동나무가 있는 이유는 봉황이 날아와 앉아 성현이 출생하기를 기원하는 마음을 담고 있다"고 설명해 주었다.
산을 넘어 퇴계종택 뒤편에 다다르자 거대한 공사현장이 눈에 띈다. '선비문화 체험교육원'을 짓고 있다. 경북도가 추진하는 '영남 옛길' 복원사업에는 퇴계 예던길도 포함돼 있다. 옛길이 제 모습을 찾고 체험교육원도 들어서면 이곳의 볼거리와 체험거리는 훨씬 풍성해질 터이다. 퇴계종택에서 북쪽으로 50m쯤 가면 상계1교가 있고, 그 다리에서 개울 윗쪽을 바라보면 소담한 한옥들이 눈에 들어온다. 계상서당이다. 퇴계 선생이 51세에 이 서당을 짓고 제자를 가르쳤으며, 이후 제자들이 몰려들자 인근에 다시 도산서당을 지었다. 퇴계의 발자취가 남아있는 이곳에 난데없이 이동식 화장실이 한 켠을 차지한 탓에 풍광을 버려놓았다. 개울에는 폐타이어도 보인다. 수십억, 수백억원을 들여 윤기나는 건물을 아무리 지어봐야 무슨 소용인가. 남아있는 유적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 이처럼 방치된 것을.
씁쓸한 마음을 뒤로 한 채 길을 따라 퇴계 묘소와 하계마을 쪽으로 향했다. 하계마을로 가려면 포장도로를 따라 갈 수도 있고, 개울 건너편 오솔길로 가도 된다. 하계마을에 들어서면 흙벽돌로 지은 커다란 담배건조장이 눈에 띈다. 아직 이런 건물이 남아있다는 것도 신기하다. 건조장 옆을 지나 조금 가파른 길을 오르면 마을 사람들이 오가는 산길과 만난다. 이른바 '광야 오솔길'이다. 민족시인 이육사는 퇴계의 14대 손이다. 길을 따라 조금만 가면 낙동강이 굽이치는 원천 마을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바위를 만난다. 그곳에 선 느낌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바위 옆 소나무에 육사가 지은 시 '광야'가 붙어있다. 육사는 이곳에 서서 굽이 도는 강물과 그 옆에 펼쳐진 너른 들을 바라본 느낌을 담아 '광야'를 지었다고 한다. '끊임없는 광음을/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중략) 다시 천고의 뒤에/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이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
낙동강과 원천 들을 품에 안은 이 바위 위에 서서 큰 소리로 '광야'를 읽어도 좋다. 저 멀리 베이징 감옥에서 안타깝게 숨을 거둔 시인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으리라.
산을 내려와 포장도로를 따라 잠시 걸으면 멀리 '이육사 문학관'이 보인다. 반드시 시간을 내서 들어가 볼 곳이다. 문학관에서 길을 따라 1.4km쯤 간 뒤 왼쪽으로 접어들면 단천교를 만난다. 다리를 건너지 말고 다시 왼쪽으로 꺾으면 '녀던길'(옛길)이라는 표지판이 나온다. '도산서원에서 청량산까지 낙동강을 따라 이어지는 이 길은 퇴계 선생께서 즐겨 다니시던 오솔길'이라는 설명이 있다. 하지만 길 안내를 맡은 이동수 회장은 "예던길을 잘못 알고 쓴 말"이라고 했다. '예(曳)던길'에서 '曳'(예)는 '끌다, 고달프다'는 의미. 이 회장은 "선현들이 '신발과 지팡이를 끌고 다니셨던 길'을 뜻한다"고 덧붙였다. 길 끝에는 '청량산 조망대'가 보인다. 강변 길을 따라 허위허위 걸음을 옮기는 퇴계 선생의 모습이 저 멀리 보이는 듯 하다. 맑은 날이면 청량산 자란봉(해발 806m)과 선학봉(826m)을 연결한 '하늘다리'도 볼 수 있다. 저 멀리 아스라이 사라지는 강변 길 끝에는 농암종택이 있고, 그 굽이를 돌아서면 가송리 쏘두들 마을로 접어든다. 흔히 퇴계 예던길은 단천교부터 청량사까지 이르는 길을 말한다. 하지만 도산서원 입구에서 시작해 퇴계종택-하계마을-광야오솔길-이육사 문학관으로 이어지는 하루 나절 길을 걸으며 퇴계와 육사를 만나는 것도 걷는 기쁨을 만끽하기에 조금의 모자람도 없었다.
글·사진=김수용기자 ksy@msnet.co.kr
도움말=성균관 청년유도회중앙회 이동수 회장 054)857-7760
전시장소 협찬=대백프라자 갤러리
장이규 작-광야오솔길에서
육사는 이곳 언덕에 서서 낙동강이 굽이치는 원천마을 들녘을 내려다본 기억을 떠올리며 민족시(詩) '광야'를 지었으리라. 장이규 작가는 "젊은 시절 스케치 여행을 위해 숱한 시간을 인근에서 보냈지만 이렇게 멋진 풍경이 있는 줄 미처 몰랐다"며 "산으로 둘러싸인 이 곳에 강물이 휘돌아 나가는 너른 들이 있음을 보고 육사는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고 노래했을 것"이라고 했다. 잔설이 남은 황톳빛 들녘은 지금쯤 봄 기운이 완연할 터. 진달래가 피고 새순이 돋는 봄에 찾아가는 광야 오솔길은 더할 나위없이 멋질 것이다. 언덕 위 평편한 바위에는 지금도 윷판이 새겨져 있다. 화전놀이 나온 마을 아낙들은 이곳에 윷을 놀며 잠시나마 여유를 즐겼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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