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기억은 정확한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기억은 사실에 가깝지만 역사처럼 진실은 아니다. 기억이란 시원찮은 화가가 아름다운 풍경에 잘못된 색깔로 덧칠한 그림과 같은 것이다. 그런 화가가 그린 봄은 생동하는 봄이 아니며 여름을 이글거리는 계절로 표현하지 못한다. 기억은 사실과 비슷하지만 더러는 미화하고 성형한 구석이 많아 믿을 것이 못된다.
그래서 기억은 모두 추억할 수 없지만 추억은 전부 기억할 수 있다. 영화 한편, 소설 한권을 보고 나면 전부를 기억할 순 없지만 주인공이 만나고 헤어지는 추억에 해당하는 명장면은 선연하게 되새길 수 있다. 그것이 기억과 추억의 차이다.
#기억의 흔적을 자극하는 '냄새'
기억이 명사라면 추억은 동사적 성격이 강하다. 기억은 애매모호함 속에 파묻혀 있는 '과거에 있었던 일'이지만 추억은 '그 속에서 놀던 때'를 그리워하는 것으로 다분히 행위적이다. 그 행위 속에는 '즐겁게 놀았다'는 재미가 숨은 그림으로 깔려 있기 때문에 추억은 그리워할수록 아쉽고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없어 더욱 애틋하다.
막연한 기억은 흘러간 그 시절의 동영상을 제대로 띄워내지 못한다. 그러나 냄새나 맛은 우리가 한참 동안 잊고 있었던 기억 속의 추억 부분을 선명한 영상으로 재생시켜 준다. 그것은 어쩌면 기억의 흔적(engram)을 자극해 주는 회상단서(retrieval cue)인지도 모른다. 개인이 전혀 의도하지 않은 상태에서 떠오른 불수의적(不隨意的) 기억들이 이렇게 냄새나 맛을 통해 리와인드되다니 신기하고 오묘하다. 그것을 무의식 속의 의식이라 해도 좋으리라.
#냄새는 곧 추억
프랑스의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보면 주인공은 어머니가 주신 세로로 홈이 파인 마들렌 과자를 홍차에 적셔 먹다가 문득 일요일 아침 콩브레에서 있었던 일을 기억해 내고 옛날로의 시간 여행을 떠난다. '프루스트 효과'라는 용어가 있듯이 작가는 냄새를 통해 옛날에 있었던 일을 기억해 내는 것을 여러 작품에서 인용한 적이 있다.
그는 갓 세탁한 침구의 냄새를 맡으며 싱그러운 바다를 연상하기도 했고, 차에 적신 비스코티를 맛보고 그 냄새를 통해 무채색의 모호한 정원 풍경을 그리기도 했다. 또 늙은 요리사가 가져다 준 토스트 한조각을 차에 적셨을 때 그 맛을 통해 오렌지 향이 나는 아주 특별한 빛을 경험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이렇듯 작가에게 있어서 냄새는 곧 추억이며 그것이 바로 문학이었다.
#김밥이 아닌 맨밥을 싸간 소풍
프랑스 태생인 프루스트와 한국의 시골 출신인 나와는 냄새에 관해서도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프루스트는 마들렌과 토스트 그리고 치즈와 홍차 냄새에 실려 옛날로 떠났지만 나의 경우 보리밥과 된장 그리고 군둥내 나는 김치 냄새가 나를 소달구지에 태워 고향으로 데려가곤 했다.
의지의 지배를 받지 않는 불수의적 기억은 '문득'이란 낱말을 타고 머릿속에 그려지고 채색된다. 정말이지 '문득 문득' 떠오르는 기억은 통상 냄새나 맛이나 풍경에서 출발한다. 나의 경우 그런 기억 중에서 좀처럼 잊혀지지 않는 것이 김밥이다.
나는 요즘도 김밥을 말고 있는 분식점 앞을 지나치면 프루스트의 마들렌보다 더 강한 인력 작용으로 고향의 어린 시절로 달려간다. 그때마다 너무 닳아 뒤축이 걸리지 않는 검정고무신을 끌며 김밥이 아닌 맨밥 도시락을 둘러메고 소풍에 나서는 초라한 아이를 만난다. 점심시간에 이르러 김밥을 싸온 친구들 무리에서 벗어나 한갓진 바위 틈새에서 혼자 눈물에 맨밥을 말아먹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지만 그게 큰 위로가 되지는 못한다.
프루스트의 홍차에 적신 마들렌 냄새가 평생 병약한 몸으로 생을 지탱한 자신에게 바친 기도였다면 김밥 냄새는 가난과 남루 속에서도 작은 꿈을 키워온 나 자신을 위한 찬가였는지 모른다.
마들렌 만세!
김밥 만세!
구활(수필가 9hwa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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