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사필귀정] 지배계급의 체제 배신

동서 냉전의 한 축을 이끌어 온 거대 제국 소련이 그렇게 급작스럽게 그것도 '평화적으로' 붕괴한 원인은 지금도 불가사의이다. "1980년대와 90년대에 소련에 닥친 심각한 경제난 때문이다" "미국이 촉발한 군비 경쟁에 소련이 말려든 결과다" "글로벌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시대 도래의 결과다" 등 수많은 주장이 제기됐지만 모두 장님 코끼리 만지기라는 비판을 면치 못하고 있다. 붕괴 현장의 한가운데에 있었던 고르바초프도 마찬가지였다. 붕괴의 원인을 명료하게 설명해 줄 것으로 기대됐던 고르바초프 회고록은 "부피만 클 뿐 내용은 없다"(예일대 역사학 교수 존 루이스 개디스)는 혹평만 들었다.

그래서 붕괴의 원인을 다른 각도에서 찾아보려는 노력이 생겨났다. 그 결과물의 하나가 '소련 엘리트의 자발적 체제 해체'라는 주장이다. 데이비드 코츠와 프레드 웨이어라는 러시아 전문가가 당시 소련 고위 관료 수백 명을 인터뷰한 결과를 바탕으로 내린 결론이다. 이에 따르면 소련에서 권력은 공산당 정치국 멤버들에 집중되어 있었지만 실제로 소련을 움직인 세력은 군 장교, 교수, 공직자들이 주축이 된 '노멘클라투라'(nomenklatura)였다. 이들은 자신들의 특권을 보호해 주던 체제를 고르바초프가 개혁하기 시작하자 기존 체제를 유지하는 것보다 해체하는 것이 더 이득이라고 판단했다. 제국의 붕괴가 진행될 때 상층부에 앉아 있으면 재빨리 가장 좋은 떡고물을 챙길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이렇게 냉혹하고 이기적이며 치명적인 결정을 고르바초프는 짐작도 못 했다. 이것이 '소련이 놀랍도록 평화롭게 돌연사한' 원인이라는 결론이다. 러시아의 최고 지도층이나 억만장자, 유력 정치가 등이 대부분 공산 체제 시절에도 고위층에 있었던 사람들이라는 사실은 이를 뒷받침한다는 것이다.('언싱커블 에이지' 조슈아 쿠퍼 라모)

매우 실험적인 주장이지만 향후 북한이 어떤 길을 가게 될지 참고할 점이 많은 시각을 제공해 주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 주장이 관심을 끄는 이유는 소련 멸망을 불가피한 역사의 진행이 아니라 전혀 예상치 못한 작은 변수들의 누적적 결과로 보고 있다는 점이다. 지배계급 구성원들이 자신의 특권을 보호해 주는 체제를 배신하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북한 내부에서도 엘리트의 체제 배신과 같은 예상하지 못한 변수들이 생겨날 수 있을까. 가능성이 없다고 단정할 수 없다. 지난 15일 국제위기그룹(ICG)이 진단한 대로 "일어날 것 같지는 않지만 (북한에서) 당과 군부, 엘리트의 충성심에도 불구하고 지도부 내의 갑작스런 균열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다만 균열이 북한의 평화로운 돌연사로 이어질지 아니면 체제 수호파와 해체파로 나뉜 피투성이 싸움으로 발전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지도부의 균열뿐만 아니라 지도부와 중간관리자 계층 간의 이반 조짐도 나타나고 있다. 중병에 걸린 것으로 알려진 김정일이 기를 쓰고 현지지도에 나서는 것이 그 단서이다. 김정일의 현지지도는 당과 지도자의 지시가 북한 사회를 움직이는 중간관리자 계층에 잘 먹혀들어 가지 않고 있음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최고 권력자가 병든 몸을 이끌고서 나다녀야 할 만큼 현장-산업이든 군사 분야이든-은 잘 돌아가지 않는다는 얘기다.

그러한 단서는 또 있다. 권위의 붕괴이다. 북한 당국은 "인민에게 쌀밥과 고깃국을 먹이자"는 김일성의 유훈(遺訓)을 실천하지 못해 김정일이 가슴 아파한다는 것을 올 들어 2차례나 공개한 바 있다. 이는 '지상낙원' 건설이 실패했음을 자인하는 것이다. '강성대국'이란 허구에 기대고 있는 김정일의 권위의 약화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이는 북한 체제의 불안정성을 가속화하면서 주류 세력을 동요시킬 가능성이 높다.

소련이 그랬듯이 북한도 우리가 예측하지 못한 시점에 예상하지 못했던 방향으로 변화할 수 있다. 그것이 남북통일로 이어질 수도 있지만 또 다른 북한의 탄생으로 귀결될 수도 있다. 이는 분명히 악몽이다. 악몽이 현실화되지 않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모순어법이지만 예상치 못한 변수에 대응할 수 있는 예측 능력을 키우는 길밖에 없다.

鄭敬勳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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