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부터 정복할 것인가, 어떻게 정복할 것인가 고민할 필요도 없다. 박물관이 전시해 준 순서대로, 정해진 동선을 따라서 정복해나가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여행은 조금 시시해진다.
세계는 박물관투성이다. 도시마다 지하철 노선의 촘촘한 그물망은 박물관 표시인 크고 작은 빨간 별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건져올린다. 디자인박물관, 민속박물관, 사진박물관, 록스타 박물관, 장난감 박물관, 소시지 박물관…. 박물관의 무한 개발은 문화적'역사적 업적보다는 여행 산업의 업적을 기대함에 틀림없다. 딱히 특별한 목적이 없는 '14박15일 유럽일주' 같은 여행상품은 반드시 박물관들을 필요로 한다. 런던으로 가는 여행자는 대영박물관을, 파리로 가는 여행자는 루브르 박물관을,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가는 여행자는 에르미타슈 박물관을 반드시 거쳐야 한다. 세곳은 박물관의 원형이자, 세계 최고의 박물관이라는 명성을 업고 있기 때문이다.
처음 여행을 시작했을 무렵, 나는 에르미타슈 앞에서 넋을 잃었다. 영화에서 본 화려한 서양 중세의 스펙터클 꼭 그대로였다. 내부는 더욱 놀라웠다. 진짜 황금과 진짜 보석들이 벽과 천장과 계단을 장식하고 있었고, 역사 교과서에서 공부했던 그 유명한 표트르 대제, 예카테리나 여제의 초상화들, 그들이 쓰던 황금침대, 황금마차, 황금왕관이 논픽션으로 전시되어 있었다. 한국의 국립박물관에조차 심드렁했던 내가 외국의 역사에 경외심마저 느꼈다. 새로운 볼거리에 대한 감동과 만족이 여행의 선물인 양 다가왔다. 그러나 한참 후에 나는 무언가 수상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왜 이곳엔 햇빛이 없을까. 왜 이곳엔 바깥의 소란이 들려오지 않을까. 그리고 깨달았다. 박물관 내부는 완벽하게 밀폐된 공간이라는 것을. 전시실은 밀실처럼 사방이 벽으로 막혀 있고 오직 밀실과 밀실만이 세계와 또 다른 세계처럼 연결되어 길을 내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마치 게임판 위의 말처럼 정해진 동선을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제일 놀라운 것은 수많은 밀실들을 모두 통과하기 전에는 빠져나갈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박물관 안에 들어서는 순간 우리는 전혀 다른 세계에 갇힌다. 에르미타슈 같은 초대형 박물관에 들어가 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끝없이 긴 복도와 미로처럼 얽혀 있는 어두운 방들, 정해진 동선대로 움직이지 않으면 출구를 발견할 수 없을 것 같은 두려움. 박물관 내부의 구조는 그곳에 들어서는 순간 우리 몸의 리듬을 즉각 관람의 리듬으로 바꾸도록 만들어져 있다. 우리는 의도된 순서대로 빠짐없이 관람한다. 의도된 감흥을 느낀다. 우리 몸은 그 곳의 전시물과 잘 어울리는, 움직이는 전시물이 된다.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에서 나는 더욱 놀라운 경험을 했다. 들어서는 순간 너무나 많은 통로들이 너무나 많은 밀실들과 연결돼 뻗어 있었다. 이집트관, 이슬람관, 그리스'로마관 등 많은 전시관들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봐야 할 지 헷갈리고 어지러웠다. 그러나 동시에 이것들을 모두 정복하고 말리라는 전의가 불타올랐다. 친절하게도 박물관 1층의 안내데스크에는 수많은 전시실을 빠짐없이 관람할 수 있는 가이드맵이 준비되어 있었다. 그러나 정말로 '빠짐없이' 관람하려면 적어도 사흘은 걸린다.
루브르에는 이집트보다 더 많은 미라가 누워 있다. 그리스'로마 유적지에서 잘라온 고대 신전의 기둥들이 통째로 모셔져 있다. 이슬람 사원에서 뜯어온 벽화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유명한 '모나리자'가 시대와 지역을 넘어 이웃사촌이 되어 있다. 놀랍게도 아프리카와 아시아, 아메리카를 무작위로 썰어온 대륙의 조각들이 유럽의 박물관 안에 퍼즐처럼 꿰맞춰져 있는 것이다.
파리라는 작은 도시가 오대양 육대주의 문화와 역사와 지식들을 한꺼번에 독점해서 "내 것!"임을 선언한다. 밀폐된 전시실에 모인 각 나라의 문화와 역사와 지식들은 서로의 이질성을 벗어버리고 '루브르의 전시물'이라는 똑같은 가면을 쓴다.
그 덕에 여행은 참 편리한 것이 된다. 아프리카, 아메리카를 가지 않아도 우리는 도시 한곳에서 전 세계를 정복한 만족감을 느낄 수 있다. 무엇부터 정복할 것인가, 어떻게 정복할 것인가 고민할 필요도 없다. 박물관이 전시해 준 순서대로, 정해진 동선을 따라서 정복해나가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여행은 조금 시시해진다. 우리는 역사와 문화와 지식의 독점시장을 백화점처럼 쇼핑한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박물관을 꼭 닮은 게 있다. 현대의 도시에 박물관만큼 흔한 백화점이다. 백화점에 들어가는 순간 우리는 바깥 세계와 차단된 전혀 다른 공간을 여행한다. 우리의 몸은 일상의 리듬에서 벗어나 즉각 쇼핑의 리듬으로 바뀐다. 전국 방방곡곡과 세계 구석구석에서 특송화물로 배달된 물건들은 백화점 진열대 위에서 서로의 이질성을 벗고 다함께 '백화점 쇼핑 품목'이 된다. 누군가의 의도대로 전시된 상품들, 누군가의 의도대로 움직이게(쇼핑하게) 만드는 층층마다의 동선…. 백화점과 박물관은 쌍둥이다. 백화점 쇼핑에 익숙한 우리의 신체는 박물관 여행이 낯설지 않다.
여행은 자유와 열정을 끓이는 모험이 아닌가. 그러나 우리는 자유롭지 않다. 친절히 안내된 길을 따라갈 뿐이다. 여행의 시대에 우리는 발견과 모험의 즐거움을 빼앗긴다. 단지 몇몇 도시에 전 세계가 백화점 상품처럼 진열되어 기다리고 있다. 발견해야 할 것들이 너무 편리하게, 너무 쉽게 목격된다. 여행은 태생부터 쇼핑을 닮았다.
미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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