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 주병선(44)에게는 아직도 '칠갑산'의 벽이 높기만 하다. 공전의 히트곡 '칠갑산'(1989)을 부른 게 그의 나이 스물세살 때. 대중들은 구성진 전통가요 창법을 구사하는 그가 20대 초반의 젊은이였다는 사실을 굳이 알려 하지 않았다. '칠갑산' 그 자체가 주병선이었기 때문이다.
주병선은 '칠갑산' 이후에도 꾸준히 음악 활동을 했다. 그러나 '칠갑산'을 넘어서는 히트곡은 나오지 않았다. '칠갑산'은 그에게 축복이자 벽인 셈이다.
주병선은 지난해 8집 '여덟 번의 행복에 대한 고백'을 발표하고 활동하고 있다. 1999년 6집 '주빌리아' 발표 이후 재작년 초 7집을 발매했지만 발매를 포기했기 때문에 8집은 사실상 그에게 10년 만의 새 음반이다.
"'칠갑산' 이후 어차피 칠갑산을 넘어설 수 없다면 그 이미지를 버리기보다 다른 느낌으로 다가서고 싶었습니다. 타이틀곡 '아리아리요'는 빠른 템포의 국악 가락 노래죠. '칠갑산'의 이미지를 크게 벗어나진 않았어요."
8집은 KBS 대하사극 '대조영' 등의 음악감독을 맡은 이필호씨가 프로듀싱했다. 이 밖에도 박해운, 홍진영, 이상준 등 젊은 뮤지션이 참여했다. 음반에는 '아리아리요'를 비롯해 '당신이 최고야' '둥굴둥굴' 등 신곡 6곡에 '대조영' OST 가운데 주병선이 불렀던 '어머니의 나라'를 새로이 편곡해 실었다. '칠갑산'은 60인조 오케스트라의 반주로 웅장하게 변신했다.
지금은 자신에게 덧입혀진 전통 가수의 이미지를 순순히 받아들이는 주병선이지만 사실 그는 록 뮤지션이었다. 여수공고 시절 그룹 사운드 활동을 하며 록 뮤지션의 꿈을 키웠고, 추계예대 시절에도 록 음악을 했다.
"록 음악으로 대학가요제에 나갔지만 3, 4차에서 번번이 떨어지더라고요. 음악은 꼭 하고 싶은데 상복은 없고…. 그런데 자세히 대학가요제 시상 패턴을 살펴보니, 전통가요를 부른 참가자에게 상을 하나는 주더라고요. 그래서 1988년 대학가요제에 전통가요풍의 자작곡 '고인돌'로 출전하게 됐죠. 결과는 금상이었습니다."
록 대신 전통가요 가수로 빠르게 변신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집안 전통 때문이었다. 부친인 주운옥씨는 풍물패 상쇠이자 향토문화재였다. 집안에는 박동진 등 국악 명인들이 수시로 드나들었다.
록 대신 전통가요를 들고 나온 주병선은 대학가요제에서 바로 2등상인 금상을 탔다. 1988년 대학가요제의 대상 팀은 신해철이 주축이 된 '무한궤도'. 조용필이 심사를 맡았고 이택림이 사회를 봤다.
이듬해인 1989년 그는 훗날 서태지가 데뷔 음반을 내게 되는 반도음반의 1호 가수로 1집을 냈다. 타이틀곡은 '슬픈 그림자'였고, '칠갑산'은 여러 수록곡 중 하나였다. 수록곡인 '칠갑산'은 신곡도 아니었다. 이미 작곡자인 조운파 선생이 다른 가수에게 한번 노래를 줬다가 다시 주병선에게 준 것이었다.
그런데 수록곡이던 '칠갑산'이 엉뚱하게 히트를 쳤다. 가수 진주의 어머니 덕분이었다. 당시 인기 프로그램이던 '주부가요열창'에서 재즈 가수 출신이었던 가수 진주의 어머니 유정금씨가 '칠갑산'으로 3주 연속 1위를 차지했다. 노래는 주부들 사이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고 곧이어 가요계 전반으로 퍼졌다. '칠갑산'은 이후 그에게 엄청난 부와 명예를 안겼다. 1집은 75만장이 팔려나갔다.
반도음반의 대표 가수가 된 그는 이후 서태지를 발탁하게 된다. 주병선은 록 밴드 '시나위'에서 탈퇴하고 홀로서기를 하는 서태지의 데모 음반을 듣게 됐고 두 명의 멤버를 보완해 '서태지와 아이들' 1집 음반이 나왔다. 음반은 초대박을 냈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하여가'에 국악기인 태평소를 넣으면 좋겠다고 제안한 것도 저였죠. 그리고 DJ.DOC의 '뱃노래' 중 전통가요 형식의 코러스를 넣은 것도 접니다. DJ.DOC 멤버 창렬이가 코러스를 해 줘 고맙다며 술을 산다고 했는데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안 사고 있어요."(웃음)
전통가요와 함께 가수 생활을 해왔고 지금도 그 길을 걷고 있는 주병선에게 지금 전통가요가 처한 상황은 좀 안타깝다. 과거 '칠갑산' 등 전통가요는 서정성이 살아있었고 한국인의 정서도 잘 담았다. 그러나 현재 전통가요는 소위 '행사용' 노래로 전락, 여러 가수들이 이벤트성으로 한번 부르는 노래가 됐다. 전통가요의 저변이 넓어진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지만 주병선은 '뽕짝'이 되어버린 전통가요의 현실이 아쉽기만 하다. "성인가요가 너무 퇴보했어요. 다 가벼운 내용의 가사에 빠르고 신나는 노래만 있죠. 차태현의 '2차선 다리' 같은 노래가 더 많이 나오고 잘 됐으면 해요."
오랜만에 만난 주병선은 자신이 사는 얘기도 했다. 1990년에 결혼한 주병선은 딸 하나와 아들 하나를 두고 있다. 딸 리아는 올해 고려대 임상병리학과에 입학해 아버지를 기쁘게 했다. 중학교 1학년인 아들 강현이 역시 아버지의 말을 잘 듣는 착한 아들이다.
"저는 아이들에게 공부를 하란 얘기를 안 했어요. 엄마가 많이 했죠. 쉬엄쉬엄 하라고 했는데 오히려 아이들이 열의를 보여주며 잘해 줬네요. 딸에게 음악을 가르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바이올린을 가르쳤는데 딸에게 '최고가 될 게 아니면 공부를 하는 것이 낫다'고 하니까 금방 알아듣고 공부를 하더라고요."
주병선은 잘 자라는 아이들을 보며 노래를 부르는 지금의 삶이 즐겁다고 했다. '칠갑산'을 넘기보다 '칠갑산'의 연장선상에서 전통가요 가수로 더욱 열심히 활동하려 한다는 얘기다.
"음악 시장의 상황이 이렇게 됐다고 불평할 게 있나요. 저만이라도 열심히 해야죠. 히트곡이 있고, 좋아하는 음악을 하고, 잘 자라는 아이들을 보고 있는 지금이 행복합니다. 행복한 전통가요를 들려드리도록 더욱 노력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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