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문화칼럼] 삶의 타임머신 '추억'

차 안 라디오에서 우연히 귀에 익은 음악을 듣는다. "낙엽 지던 그 숲 속에 파란 바닷가에 떨리는 손 잡아주던 너…." 흘러나오는 소리에 맞춰 흥얼대다 보니 세월과 함께 색이 변해버린 추억들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간다.

그땐 지금처럼 MP3나 인터넷이 없던 시절이라 테이프가 늘어날 만큼 돌려가며 듣곤 했었다. 신기하게도 그렇게 듣던 음악이 지금 이 시간에 나를 흑백의 기억 속으로 데려다 주고 있다. 비단 음악이 아니더라도 40대 이상 중장년층에게는 젊은 시절 우표 수집을 하거나 레코드판을 모으거나 뭐 하나쯤은 열정을 바친 게 있었으리라…. 한창 성장할 때는 몰랐지만 인생의 성숙기에 들어선 지금, 지나간 과거가 그리워지고 그때의 추억이 가장 값지게 느껴지는 것이 인간의 보편적 정서인가 보다.

문명이 발달할수록 정신문화는 더욱 중요해진다 했던가? 특히 우리가 살고 있는 대구'경북은 유구한 전통과 많은 문화유산을 가지고 있어 크게는 나라의 역사를 품고 있고, 작게는 우리나라 국민이면 대부분이 수학여행이나 신혼여행을 다녀온 경주라는 추억의 도시를 가지고 있다.

이런 점에서 중장년층의 향수를 유발하고 신세대들의 호기심을 자극할 수 있는 추억을 소재로 한 테마 프로그램 개발은 우리 대구'경북만의 의무이면서 특권이다. 말초적 자극만을 선호하는 요즘 신세대에게 "옛날 옛적에 말이지…"로 시작하는 고리타분한 이야기는 별 흥미를 얻을 수 없고 그저 책 속에서나 있을 법한 과거의 이야기려니 하는 세상이 되어 버렸다. 이럴 때 향수와 추억을 함께 전해주는 '복고 프로그램'이 우리 지역에서 운영되고 있어 무척 다행이다. 특히 경주는 3년 전부터 중장년층이 옛 교복을 입고 '어게인(Again) 경주'를 외치고 있다.

참가자들 모습을 보면 졸업한 지 30년 이상 된 늙은(?) 학생들로 옛 교복을 입고 유적지를 다닐 때마다 다른 관광객에게 원숭이처럼 구경거리가 되기도 하고 즉석에서 인기 스타가 되기도 한다. 교복을 입었던 세대에게는 아련한 향수를, 신세대에게는 이색적인 모습을 주기 때문이다. 나도 한 발짝 떨어진 거리에서 이들의 수학여행 '복습'(復習)을 지켜보면서 이들과는 또 다른 나만의 추억을 떠올리기도 한다. 이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사람들도 옛 추억을 살리고, 모교를 알리는 자부심에 이런 치기도 즐겁기만 하다. 보는 이도 즐겁고, 참가자도 더불어 좋아하는 광경이다.

또한 그 시절을 추억할 수 있도록 가방, 모자, 완장, 삶은 달걀, 소주병 등 세세한 소품까지 준비하고 있고 불국사나 첨성대 등 유명 유적지에서는 입장료를 학생 요금으로 받아 손님을 모시는 지역민의 사랑이 함께 녹아 있다. 이 모두가 새로운 관광 대안 개발을 위해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민(民)과 교복 등 재정 지원을 해준 경북도청과 경주시청 등 관(官)의 노력이 수평적으로 합해져 시너지 효과를 낸 결과이다. 한 명문 고교 동문들이 매년 졸업 50주년을 맞아 3년째 부부동반으로 300여 명이 행사에 참여한다고 하니 이제는 중장년층을 위한 대표적 프로그램으로 확고히 자리를 잡은 듯하다.

대구'경북 각 지자체도 다들 유형적인 문화재만 관광자원으로 생각하는 지금, 적은 비용으로 큰 기쁨을 줄 수 있는 '감성 마케팅'을 새로운 문화관광 패러다임으로 적극 생각해 봐야 할 때이다. 하지만 사람의 감성을 자극하다 보니 단기적 이벤트로 끝날 수 있다는 우려감도 적지 않다. 이러한 우려를 극복하기 위해 30주년, 35주년을 50주년 기념으로 다시 연결할 수 있도록 기념식수 등 추억을 통해 현재 생활에 활력을 주고, 현재의 모습이 미래에 새로운 추억으로 자리 잡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꼭 어른들에게만 교복을 입힐 것이 아니라 자녀를 동반한 가족 관광객에게 예전에 입던 까만 교복과 모자를 아이에게 입히고 부모들과 함께 흑백으로 사진을 찍어 엄마, 아빠의 옛 모습과 오버랩시켜 준다면 재미있는 추억 상품이 될 것이다. 이 어린이에게는 부모님과 함께 있는 현재의 모습이 미래엔 또 다른 추억이 되어 경주를 다시 찾을 것이기 때문이다.

추억은 누구에게나 있지만 '추억'이라는 브랜드를 활용할 수 있는 곳은 많지 않다. 그런 점에서 추억을 브랜드화할 수 있는 경주를 비롯한 대구'경북의 역할은 매우 크다.

진병길 신라문화원장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