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엄창석의 뉴스 갈라보기] 정치주의의 미신

얼마 전에 서울 광화문에서 택시를 탔다. 뒷좌석에 타고 신호등 몇 개를 지나지 않아 나는 아주 익숙한 상황과 맞닥뜨리게 되었다. 운전기사와 자연스럽게 나누던 이야기가 가파르게 정치 문제로 건너가는 것이다. 택시 안에서의 정치 얘기는 우리 사회에서 가장 흔한 풍경이다. 그런 얘기가 그치지 않자 나는 이렇게 불평을 터뜨리고 말았다.

"기사님 그만하시죠. 정치 얘기는 정말 지긋지긋합니다."

내가 그만할 것을 주문했지만 이미 얼굴이 벌겋게 달아있던 기사의 말문을 막기에는 너무 늦었다.

"지겹다고요? 우리 모두가 정치의 영향을 받고 삽니다. 도대체 정치적이지 않은 게 뭐가 있습니까?"

기사는 그쯤에서 박정희의 만주군 얘기를 그치는가 싶더니, 요즘 정치판으로 무대를 옮긴다. 세종시와 4대강 등 논쟁적인 화제를 더욱 장황하게 펼쳐보인다. 나는 그냥 내버려둘 수밖에 없었다. 내용이야 그렇다 쳐도 구체적인 상황과 사안의 연월까지 소상히 암기해서 꺼내놓는 기사는 웬만한 정치평론가를 뺨칠 지경이었다. 어디 택시기사만 그런가. 우리 주변에 정치평론가들이 넘쳐나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우리 사회가 정치에 대해 몰두하는 것을 나무라기는 어렵다. 오랫동안 정치적 변동을 겪어온 때문에 모두가 정치에 지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오히려 지난 정권의 명칭이 '참여정부'이듯이 모든 이가 정치에 관여하도록 독촉받아 왔고 또 그렇게 되는 것이 국민의 바람직한 임무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이러한 현실 정치에의 몰두는 지난 시대의 산물이다. 폭압적인 체제에서 유발되는 모순이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에게까지 전달되어서 정치의 풍향은 각 개인들의 삶만큼 중요했다. 문민정부 이후에도 습관처럼 정치의 움직임에 촉각을 세우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는 개인의 삶을 현실 정치에 대한 관심보다 더 우위에 둘 필요가 있지 않나 싶다. 이 말은 오늘날 대중이 더 이상 정치에 관여하지 않아도 될 만큼 우리 시대가 질곡의 터널을 벗어났다기보다 정치적 담론만으로는 당면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점을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사안만으로도 이 말은 충분히 증명된다. 수년째 끌어왔으나 한걸음도 전진하지 못하는 세종시를 보면 정부를 이전하는 실제의 논의는 실종하고 정부 이전에 따른 정치적 파장에만 몰입하고 있다. 신문의 분석 기사는 물론이고 일반인의 대화도 희한하게 눈에 보이지 않는 정치적인 역학 따위에 관심을 집중한다. 이를테면 여와 야, 보수와 진보, 현재 권력과 미래 권력, 충청권 표심의 향배가 논란의 축을 이룬다. 그뿐 아니라 그 지점에서 논리와 명분이 만들어지기까지 한다.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정치인들이 아니라 평범한 장삼이사(張三李四)들이 이러한 정치의 풍토를 '정치적'이라는 이유로 용인해 준다는 점이다. 오히려 일반인들이 정치인들보다 더 '정치'에 접근한다. 어딘가 교활하고 음험한 느낌마저 주는 '정치적'이라는 말이 우리에게 익숙해져 버렸다. 우리가 현실정치를 이해하고 관심을 가질수록 핵심적인 사안은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고 더욱 '정치적'인 미궁 속으로 숨는 역설을 낳는다. 어느새 우리를 둘러싼 정치는 안과 밖의 구별이 없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순환의 늪으로 우리를 빠지게 할 뿐이다.

대중들이 현실 정치에 깊이 관여하는 것은 분명히 서구적인 전통이다. 서구 역사에서 무수히 바뀌어온 정치제도가 이를 잘 말해준다. 그러나 오늘날 서구에서 불어오는 것은 정치를 폭 넓게 받아들이는 개념의 변화이다. 이는 다층적이고 세계화가 된 현실에서 정치적인 것의 한계를 돌파하려는 시도에서 비롯된 현상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알랭 바디우나 자크 랑시에르 같은 정치철학자들에게서 보듯이, 과거 사건이 우리의 보편적 믿음으로 스며들고, 혹은 다양한 미학적 생성으로부터 정치적인 것을 감각하는 여유를 가질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미 우리 사회는 정당 중심의 정치 논리에 의해서 좌우되는 시대는 지났다.

택시 기사들도 정치판 얘기보다 이런 말을 선호할 때가 되지 않았나 싶다.

"손님, 어젯밤에 K방송 코미디 보셨습니까?"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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