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떠올리기 싫은 기억이 있게 마련이다.
필자 또한 마찬가지인데, 어릴 적 '똥통'에 빠진 적이 있다. 신작로 옆 큰 재래식 화장실이었다. 문 대신에 짚으로 두툼하게 엮은 거적이 걸려 있었다. 담벼락을 기대고 옆으로 가다가 그만 그 속에 빨려(?) 들어가고 만 것이다.
그런데 따스한 햇살도 기억나고, 흙 담벼락의 탁탁한 촉감도 기억나는데 빠진 이후의 기억은 나지 않는다. 어린 마음에 너무 창피해서 그 기억을 스스로 지워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10대 때 본 영화 중에 알츠하이머병에 걸린 퓰리처상 수상 작가에 대한 이야기가 기억난다. 뛰어난 여류작가가 서서히 기억을 잃어가고 급기야 사물의 이름도 기억하지 못하는 지경이 된다. 마지막에 수상 소감 발표회장에서 그는 객석을 향해 손을 뻗어 누군가를 애타게 찾는다. 그런데 그 사람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 진땀을 흘리던 주인공은 결국 이렇게 말한다. "나의 아름다운 사람, 나오세요!" 그 사람은 바로 남편이었다.
기억을 소재로 한 영화들이 많다. 대표적인 것이 '메멘토'이다. 주인공은 아내가 살해당하던 날의 충격으로 10분 이상 기억을 지속시키지 못하는 단기 기억상실증 환자가 된다. 온몸에 사건의 단서를 문신으로 남기는 모습은 우리가 가진 기억의 끔찍함과 절박함을 잘 표현하고 있다. '나비 효과'는 지워버리고 싶은 어린 시절의 기억을 가진 주인공이 잘못된 과거를 바꾸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고, '아이, 인사이드'는 기억상실증에 걸린 주인공이 남은 기억의 파편을 가지고 운명을 바꾸는 절박함을 그리고 있다.
'거미숲'의 주인공은 기억의 모호함 때문에 고통받고, 하루를 지나면 기억이 원점으로 돌아오는 '첫 키스만 50번째'라는 영화도 있었다. '첫 키스만 50번째'는 로맨틱 코미디지만, 실제 상황이라면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기억에 관련된 영화를 보면서 늘 느끼는 것이 '내 기억을 믿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다. 좀 더 확대하면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까지 나온다. 리들리 스콧 감독의 '블레이드 러너'에서 안드로이드에게 이식된 타인의 기억. 그게 나라면, 나는 무엇인가, 이런 식이다.
지난해 말 개봉된 '더 문'이 그렇다. 달 기지에서 3년만 견디면 사랑하는 가족이 있는 집, 지구로 돌아갈 수 있다. 2주 후면 가족 품에 안길 수 있다는 기대에 부푼 주인공. 그러나 그것은 주입된 기억이고, 나 또한 유통기간 3년의 복제인간이다.
기억하지 않는 것이 차라리 좋을 일도 있다. 기억 때문에 더욱 고통받고 상처받는다면 말이다. 가끔 내 머리 속에 지우개가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드는 것도 그 때문이다.
김중기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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