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성은 보통 아이들보다 서너살 늦은 열일곱 나이에 수창보통학교를 졸업했다.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서동진이 운영하는 대구미술사에 들어가 수채화를 배우면서 당시 'O(零)과회' 같은 문예단체의 그룹전이나 1930년에 서동진 등이 주축이 돼 결성한 '향토회'에 가장 많은 작품을 출품하며 참가했다. 1929년 제8회 조선미전 첫 입선을 시작으로 1931년 봄 제10회 조선미전에서 첫 특선에 뽑혀 화제가 되면서 동경으로 건너간 1931년 말 이후 4, 5년 사이에 놀라운 성장을 보였다.
이인성의 삶도 극적이지만 작품의 전개에서 보여주는 변천 역시 경이로운 데가 있다. 명성이 높아지는 만큼 그의 수채화도 빠르게 변했는데 스무살 때 첫 특선에 뽑힌 '세모가경'(歲暮街景)까지는 당시 대구 선배 화가들의 방식대로 주변 환경에 현장의 느낌을 살려 재현한 수채화였다. 일찍 그림에서 자신을 인정받았기에 누구보다도 열심히 큰 흥미를 가지고 그렸고 테크닉은 곧 능숙해졌다. 그의 첫 특선작에서 들을 수 있는 비평은 달필을 칭찬(김주경)하거나 달필의 도취를 경계하라는 충고(윤희순)였다.
이때까지의 작품들은 대개 거리에 나가 직접 사생을 할 수 있는 가로풍경 또는 원경이 대부분이었다. 평면적인 수채화의 속성상 원근감이 나기 쉬운 구도를 선호한다. 초창기 대구 수채화가 거의 이런 구도의 풍경화들이었으나 이인성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이 수준에서 빨리 벗어난 작가가 없다.
중요한 변화는 이듬해 봄인 1932년 4월에 일본서 그린 정물 '카이유'가 조선미전에서 연이어 특선을 하고, 잠시 귀국해서 그린 '어느 여름날'이 일본 '제전'에서 입선을 하면서부터다. 앞의 그림에는 지금까지와 다른 시도가 있는데 색채가 강렬하고 형태를 그리는데 있어 자신감이 넘쳐 보인다. 필치가 짧아지고 리드미컬한 방향을 타며 색의 채도에서는 미치지 못하지만 '노란 옷을 입은 여인'에서 본 활수하고 경쾌한 붓놀림이 시작되고 있다. 풍경도 이제는 실내 또는 정원을 그리되 우거진 초목의 덩굴 등 훨씬 구성이 복잡하고 장식적이 된다. 보나르의 작품을 연상시키듯 인물이 배치되는 것도 이전과는 다른 점이다.
이 그림 '계산동 성당'을 보면 몇몇 새로운 변화의 시도가 적용돼 있다. 어떠한 구도도 쉽게 처리할 것 같은 그의 붓 앞에서 이제 해결되지 않는 대상은 없을 듯하다. 각진 건물벽면의 요철을 점묘파의 단속적인 필촉으로 구조에 따라 방향을 주며 그려나갔다. 그가 정물화의 새로운 장르에 도전하였듯 이 그림에서는 지금까지와 다른 시각에서 접근해 훌륭하게 소화해냈다. 그의 작품에 '계산동 성당'이 보이는 예는 여럿 있지만 대개 원경이었다. 이런 식의 접근은 일본 유학 무렵 소재와 시각상의 변화가 오고 난 후이다. 불투명 수채화의 실험과 더 장식적인 식물 넝쿨이 보이는 '성탑'은 좀 더 나중의 작품일 것이다.
그림 속 첨탑에 백색 호분과 특히 붉고 푸른색이 강조되어 눈에 띤다. '가을 어느 날'과 '경주의 산곡에서'의 적토와 맑게 갠 하늘빛의 그 '향토색'의 등장을 암시하는 것이 아닌지. 성당의 남쪽에서 바라본 동쪽 후진(apse)쪽은 벌써 그늘이 드리워진다. 오후의 햇빛이다. 계절과 시간에 따른 일기의 변화를 예민하게 반영하는 그의 그림 특성상 겨울을 전후한 무렵일 것 같고 시기는 대략 1933년쯤으로 짐작된다.
김영동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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