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미국 역사를 움직이는 '아홉 法神'

더 나인(THE NINE)/ 제프리 투빈 지음/강건우 옮김/라이프맵 펴냄

2000년 미국 대통령 선거 당시, 앨 고어 후보가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는 연설을 하고 있다.
2000년 미국 대통령 선거 당시, 앨 고어 후보가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는 연설을 하고 있다.

'미국을 움직이는 아홉 법신(法神)의 이야기' 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책은 '미국 연방대법원의 판결이 곧 법이며, 미국의 역사'임을 보여주는 책이다. 미국 사회의 첨예한 사안, 중요한 사안에 대해 연방대법원 9명의 대법관이 내린 판결이 곧 '미국인의 생각이며 미국 사회'라는 것이다. 그러니 그 판결은 곧 미국의 역사라고 할 수도 있다.

2000년 12월 12일, 미국 연방대법원은 5대4로 '플로리다주 수작업 재개표를 명령한 플로리다 주 법원의 결정은 헌법에 위배된다'는 판결을 내렸다. 제43대 미국 대통령 선거 35일 만에 공화당의 조지 부시 후보가 미국의 새 대통령으로 확정되는 순간이었다.

(2000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조지 부시 공화당 후보와 앨 고어 민주당 후보는 접전을 펼쳤다. 특히 플로리다 주에서 앨 고어 후보는 몇 백표 차이로 부시 후보에게 패배한 것으로 집계됐는데, 개표 과정에서 1만4천표가 무효표로 판정된 점이 문제가 됐다. 이 무효표에 대해 앨 고어 측은 수작업 검표를 요구했다. 미국 대통령 선거법은 한 주에서 한 표라도 더 얻은 사람이 그 주의 선거인단을 모두 차지한다. 플로리다 주의 선거인단은 25명이었고, 자동검표 결과 몇 백표 뒤졌던 고어 후보가 수작업 검표 결과 이긴 것으로 드러난다면 플로리다 주 선거인단 25명을 차지해 대선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그러나 미국 연방 대법원은 '수작업 개표는 위헌이다'고 판결했다.)

미국 연방 대법원이 '수작업 개표는 위헌이다'고 판결했을 때 고어 진영은 충격에 빠졌다. 그러나 다음 날 앨 고어 민주당 후보는 TV에 나와 패배를 인정했다. 그가 진정으로 플로리다 주에서 패배를 인정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연방 대법원의 권위를 거스른다는 것은 곧 '미국 자체'에 대한 도전임을 모르는 미국인은 없었다. 연방대법원의 판결을 부정한다는 것은 '대선 승리'를 떠나 '미국과 미국인'을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조지 부시 대통령 취임 뒤이기는 하나 나중에 문제가 됐던 1만4천표에 대한 수작업 개표가 이루어졌고, 그 결과는 역시 부시 후보의 승리로 밝혀졌다.)

이처럼 미국 연방대법원은 행정부와 입법부를 초월해 미국 사회의 모든 중요한 사안에 대해 최종 결정을 내린다.

연방대법원 9인의 대법관, 이들은 누구이며 어떤 과정을 통해 어떤 판결을 내리는가. 이 책은 대법관들을 대상으로 한 독점 인터뷰와 미국 역사에 대한 깊은 통찰, 시기별 국민정서, 대법관 개인의 성향, 대법관을 임명한 여러 대통령의 성향 등을 통해 미국의 어제와 오늘을 들여다보는 책이다.

미국 연방대법원은 44개의 계단과 8개의 기둥 뒤에 버티고 서 있는 살아있는 권력이자, 매혹적인 정치체제다. 국회의사당, 워싱턴 기념탑, 링컨 기념탑 등 워싱턴에 있는 기념비적 건축물들은 그 자체로 어떤 경외심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1928년 의회가 지정한 연방대법원 청사 부지는 국회 의사당과 국회 도서관 사이에 꽉 끼인 비좁고 좌우 대칭도 맞지 않는 땅이었다. 이 볼품없이 생긴 땅에 들어설 연방대법원의 품격과 위대함을 표시하기 위해 건축가 캐스 길버트는 44개 계단과 8개 기둥을 생각해냈다. 육중하고 위압적인 계단과 장중한 기둥에 둘러싸인 현관문을 통과함으로써 연방대법원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일상과는 한 차원 높은 곳에서 작동하는 사법(司法)의 힘, 일종의 장엄함을 확인하는 것이다.

9인의 연방대법관은 엄격한 인준 과정을 거쳐 임명되며, 종신 임기제다. 스스로 사퇴하거나 사망하지 않는 한 어떤 책임으로부터도 자유롭다. 국민들의 의지에 영합해야 할 이유도 없다. 그럼에도 1925년부터 2005년까지 대법원을 대표하는 판결들은 '대단히 세밀하게 국민여론을 반영한 판결'이었다.

지은이는 "만약 (연방 대법원이 판결한) 사건들을 국민투표에 부쳤더라도 같은 결론이 나왔을 것"이라고 진단한다. 미국 연방대법관들이 누구의 눈치도 살피지 않지만, 결코 국민의 뜻에 반하거나, 시대적 요구를 외면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것이 연방대법원의 권위가 절대적으로 국민들의 인정을 받는 근거일 것이다. 더불어 그처럼 국민의 뜻을 제대로 반영했기에 그것이 곧 미국사회의 모습이며 역사로 평가받을 수 있는 것이다.

이 책은 몇 가지 주제로 나누어 미국 연방대법원을 살펴보고 있다. 먼저 각 행정부가 임명했던 연방대법관들의 인물별 특성 즉, 그들은 어떤 과정을 거쳐 어떻게 대법관이 됐으며, 어떤 주요한 판결을 내렸는지 살펴본다. 또 시대별 중요 사건이나 이슈에 대해 연방대법관들이 내린 결정을 바탕으로 미국 사회를 진단하기도 한다. 연방대법관을 임명하는 대통령의 성향이 대법관 숫자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도 살펴본다. 보수적인 성향의 대통령은 보수적 인물을, 진보적 성향의 대통령은 진보적 인물을 임명해왔다. 물론 자신의 임기 중에 9명의 연방대법관 중 '공석'이 생기지 않아 대법관을 임명하지 못한 대통령들도 있었다.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9명의 대법관들이 첨예한 문제에 대해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들은 중요한 문제들 즉, 사형제 유지, 사형 집행, 낙태, 동성애 등에 관해 주로 5대 4에 가까운 판결을 내렸다. 거의 대부분의 쟁점에 대해 팽팽하게 맞섰고, 한 표 정도가 판결을 결정했다.

미국 연방대법원은 조지 부시 대통령 임기 시절부터 다소 보수적 경향으로 돌아섰다. 2005년 대표적인 진보진영 여성 대법관 오코너가 개인적 신념과 사정으로 사임한 뒤 부시 대통령은 보수주의자 존 로버츠를 임명했다.

지은이 제프리 투빈은 '뉴요커'(The New Yorker) 소속 작가이자 CNN 법조담당 해설자다. 정치를 주제로 한 여러 권의 책을 썼다. 대법원의 최근 역사를 담기 위해 대법관들 및 주변 인물들을 인터뷰했다. 그 덕분에 대법관의 성격, 사법 철학, 유대관계 등이 판결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알 수 있다. 639쪽, 3만8천원.

조두진기자 earfu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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