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구활의 고향의 맛] 갈치와 웅변

제주도에 가면 맨 먼저 서부두로 달려간다. 공항에서 택시로 잠시 가면 되지만 그래도 조바심이 난다. 이곳 명물인 갈치회와 갈치구이를 맛보기 위함이다. 한라산에 눈이 와 눈꽃과 상고대가 제대로 피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 겨울 병이 도진다. 지난해 옛 악우들이 탐라국을 방문한다기에 기꺼이 따라 나섰다.

백록담까지 오를 수 있는 겨울 등반 루트는 성판악 코스뿐이다. 영실 코스와 어리목 코스는 윗세오름까지만 갈 수 있을 뿐 정상 길은 막혀 있다. 성판악 코스는 왕복 8시간이나 걸려 지루하지만 크리스마스카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눈 덮인 늘 푸른 나무들이 보내주는 격려와 갈채가 피곤을 보상해 주고도 남는다.

산을 오를 때 "하산하여 갈치 맛을 한번 더 보고 비행기를 타자"고 약속했는데 무엇이 잘못 되어 꼬이고 말았다. 백록담에 올라가자마자 제주 똥돼지 삼겹살 판에 퍼질러 앉아 소주 몇 잔을 마시고 내려오니 무정한 친구들은 두 대의 버스 중 한 대를 끌고 서부두로 줄행랑을 놓은 뒤였다. 몹시 속이 상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오래 절여진 간갈치 타박한 맛 일품

생선 중에서도 나를 닮은 키 큰 은빛갈치를 좋아한다. 굵은 놈은 굵은 대로 굽거나 지져 먹고, 가는 놈은 바짝 구워 뼈째 아작아작 씹어 먹으면 기가 막힌다. 싱싱한 것은 싱싱한 대로 맛이 있고, 오래 절여진 간 갈치는 타박한 맛이 일품이다. 어릴 적 고향 장에는 신물 갈치는 거의 없었고 죄다 소금에 푹 절은 독간 갈치밖에 없었다. 나의 입맛 또한 간 갈치 맛에 길들여져 있다. 지금도 한 점 떼먹으면 너무 짜 고개가 저절로 흔들리는 것을 먹어 봤으면 싶지만 구하기가 만만찮다.

갈치는 굽거나 무를 넣고 찌개를 하거나 국을 끓여 먹어도 좋다. 갈치를 반으로 갈라 말린 갈치 포 조림은 도시락 반찬으로 최고요, 멸치잡이 그물에 걸려나온 새끼갈치를 말린 '갈치떼기'는 맥주 안주로 최상급이다. 또 김장김치에 싱싱한 잔 갈치를 썰어 넣거나 내장으로 담근 갈치속젓을 양념으로 넣으면 멸치젓보다 훨씬 시원하고 깊은 맛이 있다. 그러고 보니 버릴 것이 없는 게 갈치다.

초등학교 4학년부터 졸업할 때까지 웅변을 열심히 했다. 원고는 어머니가 직접 써주셨다. 그 원고를 외워 학교에서는 물론 인근 교회에 가서 예배가 끝난 후 웅변 판을 벌여 박수를 받기도 했다. 한 번은 시골 어느 교회에서 웅변을 하고 돌아오는데 전도회 회장님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며 커다란 생물 갈치 한 마리를 손에 쥐어 주셨다.

그날 저녁 어머니가 숯불에 구운 갈치 토막 위에 갖은 양념을 끼얹어 주셨는데 얼마나 맛있던지 지금도 황홀한 그 맛을 잊지 못하고 있다. 하기야 간 갈치만 갈치인줄 알았던 혀가 차원이 다른 생물 갈치, 그것도 농염한 맛을 품고 있는 대물 갈치 맛을 보았으니 혀가 어찌 바람이 나지 않을 수 있었을까. 그것은 농투성이 아내만 여자인 줄 알고 있던 남정네가 시장통 기생집 작부의 허벅지살을 훔쳐본 것과 무엇이 다르랴.

#웅변 원고는 생각 안나고 갈치만 떠올라

군 단위 종합 예술제가 경산공회당에서 열렸다. 나는 학교 대표로 웅변을 하게 돼 있었다. 평소에 낱말 하나 틀리지 않고 원고를 휑하니 외우고 있던 터여서 선생님도 빈손으로 나가라고 시키셨다. 그런데 사고가 나고 말았다. 단상으로 올라가면서 빨리 끝내고 갈치를 구워먹을 생각을 한 것이 화근이었다.

단상에서 내려다보니 청중들의 눈이 생물 갈치의 눈처럼 반들거렸다.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로 시작되는 서두는 잘 끄집어냈는데 다음 문장이 전혀 생각이 나지 않았다. 하늘이 노랬다. 갈치 동가리 하나 때문에 평생 애통해 할 일을 저지르다니. 나 원 참.

구활(수필가 9hwal@hanmail.net)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