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 12월 대륙에서 불어오는 찬바람을 무릅쓰고 국경을 넘는 대가족이 있었다. 만주 대륙으로 떠나는 이회영 일가였다. 당시 이회영은 이미 44세에 달하는 장년이었다. 그러나 그는 나이를 아랑곳하지 않고 한겨울, 찬바람 부는 대륙으로 떠났다. 이회영뿐만 아니라 그의 형 건영, 석영, 철영과 두 동생 시영, 호영 가족까지 포함된 온가족의 집단 망명이었다. 이들은 국외에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기 위해 만주로 가는 길이었다.
조선총독부에 따르면 이회영 일가가 망명하기 두 달 전쯤인 1910년 10월 7일 총 일흔여섯명의 양반이 이른바 '합방 공로작'을 수여받았다고 한다. 합방 공로작은 한마디로 나라를 망하게 하는 데 결정적 공을 세운 매국노들에게 수여한 것이다. 나라가 망했는데 적국으로부터 작위를 수여받을 만큼 당시 양반 사대부 계급의 속내는 새 체제 아래에서도 지배층의 지위를 누리면 그만 아니냐는 것이었다. 이런 이유로 의병을 일으킨 일부 인사들을 제외하면 양반계급은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대표적인 명문가였던 이회영 일가가 집단 망명한 일은 큰 파문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이회영 일가는 가산을 모두 정리하여 약 40만원(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수백억원)의 거금을 마련하였고, 이 돈으로 중국 합니하강 근처 토지를 사들여 1912년 음력 3월부터 학교를 짓기 시작했다. 그 학교는 이후 조선 독립군 양성에 큰 공을 세우게 되는 신흥무관학교였다. 신흥무관학교는 일제에 무장으로 이기기 위하여 군대 전술과 총기, 게릴라 전술을 훈련시켰고 학생들의 사기는 독립의 열정으로 드높았다.
이회영 선생은 데리고 온 종들을 우선 독립군 일원으로 받아들였는데, 원래 종이었던 홍흥순이 종래 습관대로 "예~" 하고 길게 대답할라치면 "이젠 종이 아니라 독립군이다. 심부름도 독립을 위한 일인데 앞으로 노비 때 행색을 하면 엄벌하겠다"고 꾸짖기까지 했다. 이회영 일가를 따라서 열세명의 종이 함께 왔는데 독립군이 되면서 상하와 귀천, 나으리와 종이 없었다고 한다.
신흥무관학교를 세운 후 이회영은 고종 망명계획을 세웠으나, 망명 직전 고종이 급서함으로써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당시 온나라에는 고종의 망명이 가져올 나라 안팎의 파장을 고려하여 일본이 고종을 독살했을 것이라는 설이 파다했다고 한다. 헤이그 특사사건을 비롯한 독립운동사의 굵직굵직한 사건들 뒤에는 늘 이회영 선생이 있었다. 하지만 선생은 이승만이 미국에 조선의 위임통치를 청원한 사실을 알고, 그를 대통령으로 선출한 임시정부에 등을 돌리게 된다. 또한 사회주의국가 러시아에 다녀온 조소앙의 보고를 듣고 사회주의에 대한 미련도 버리게 된다.
당시 중국에 있던 이회영 선생의 집에는 온갖 망명객들과 애국지사들이 들끓었으며, 집안 살림은 그들에 대한 지극한 환대 속에 조금씩 기울어 결국 끼니를 잇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그럼에도 독립에 대한 선생의 열정은 식을 줄 몰랐고, 권력에 대한 집착이 독립운동 내부의 분파를 낳는다고 본 선생은 점차 아나키즘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아나키즘은 1902년 일본의 한 대학생이 '무정부주의'라고 번역하면서 한자 문화권에서 정부가 없는 혼돈 상태를 뜻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고, 이는 동아시아 사회에서 아나키즘이 전파되는 데 커다란 장애요소가 되었다. 하지만 아나키즘은 무정부주의나 혼란 상태와는 무관하며, 그 어의에 가깝게 우리말로 번역한다면 '자유연합주의'에 가깝다고 한다. 아나키스트나 사회주의자가 인간 해방을 지향하는 점은 같지만 독재에 대한 생각은 다르다는 뜻이다.
무장투쟁으로 일제 지배에 저항하였으며, 누구도 억압하지 않고 누구에게도 억압당하지 않는 사회를 꿈꾸었던 아나키스트 이회영. 그는 우리 역사에 보기 드물게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진정한 애국자이며, 이 시대 더 많은 이들에게 알려지고 기려져야 할 문제적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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