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의 명소는 서문시장이다.
서문시장이란 이름은 대구 읍성 서문 밖에 자리 잡은 시장이란 뜻이다. 조선시대 대구에는 경상감영이 자리 잡고 있었고, 지금의 동성로, 남성로, 서성로, 북성로 거리에 축성된 읍성이 감영을 둘러싸고 있었다. 당시 지금의 남성로 자리에 있던 서남쪽 성벽 바깥을 끼고 큰 길이 나 있었는데, 그 길이 조선시대에 부산에서 서울로 가는 영남대로였다. 대구읍성의 서문을 열고 나서면 영남대로가 나오고, 영남대로를 지나 대구천을 건너면 큰 시장이 있었는데, 바로 서문시장이었다.
서문시장의 명성은 조선 후기부터 전국에 널리 알려졌다. 당시에 이미 서문시장은 전국 3대 시장 중 하나로 발전하고 있었다. 교통의 요지에 자리 잡은 서문시장은 영남 등 전국에서 주요한 물품들을 사들이고, 이를 다시 수요가 있는 지역으로 전매하면서 크게 번창하였다. 서문시장은 조선 후기 포목시장으로도 명성이 자자했다. 당시 옷감으로 대중들에게 가장 사랑을 받았던 것은 면포였다. 면포는 운송이 간편하고 고가여서 상인들에게 높은 수익을 안겨주었다. 면포의 주산지는 경상도와 전라도였는데, 특히 경북에는 면화를 재배하기에 적합한 땅이 많아 질 좋은 면포가 많이 생산되었다.
경상도산 면포들은 대구 서문시장으로 모였다가 다시 인근의 지방 시장이나 멀리 서울이나 함경도의 원산, 함흥 등지로 판매되었다. 19세기 말 한 기록에 따르면 경북에서 함경도 지방에 판매한 면포만 한 해에 50만필이 넘었다 .
이렇게 번창했던 서문시장은 일제가 조선을 식민지로 병합하면서 큰 타격을 받았다. 일본 상품들이 아무런 제약 없이 경부철도를 타고 무더기로 쏟아져 들어와 조선의 시장을 공략했다. 근대식 공장에서 저렴하게 생산된 일본산 광목 제품들은 조선산 면포를 시장에서 밀어내면서 조선의 재래 면직업을 몰락시켰다. 이러한 공세는 토착 면포업을 기반으로 성장해 왔던 조선 상인에게도 심각한 타격을 입혔다. 재래 산업의 몰락은 면직업에만 그치지 않았다. 제지업, 철 수공업, 양조업 등 수공업 전 분야가 일본 상품의 공격을 받고 몰락했다. 일본 상인들은 조선총독부라는 권력의 비호를 받으며 자국에서 생산된 저렴한 공산품을 앞세워 대구의 상권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했다.
이들의 공격에 서문시장에서 대대로 영업을 해 왔던 조선의 상인들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질 수밖에 없었고, 결국 상권을 넘겨주고 일본 상인들이 공급하는 상품을 판매하는 중도매상이나 소매상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식민지화 과정에서 몰락했던 상인들의 분노는 1919년 3·1운동에서 드디어 폭발했다. 지방의 3·1운동은 대부분 장날을 이용해 장터에서 일어났다. 만세 시위에는 상인들이 대거 가담했다. 대구의 3·1운동도 3월 8일 서문시장, 3월 10일과 30일 남문시장에서 일어났다. 만세 시위를 주도한 것은 기독교 지도자들과 교사, 계성학교, 신명여학교, 대구고보의 학생들이었지만 시위대의 다수를 점한 것은 시장 상인들이었다. 특히 초기 시위 주도층들이 대거 검거된 이후 발생한 3월 10일과 30일 시위에서는 상인들이 시위대의 주력을 형성했다.
조선 상인들의 저항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검거를 모면한 학생들이 상인들을 상대로 철시 투쟁을 전개하자 조선 상인들이 여기에 적극적으로 동조해 4월 1일 일제히 상점문을 닫았다. 일제 관헌이 나서 상인들의 철시를 제지하였지만 상인들은 굴복하지 않고 다음날에도 시위를 이어갔다. 4월 2일의 철시 시위를 주도한 것은 서문시장 상인들이었다.
일제의 침략으로 초래된 시장의 변화는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조선의 재래 상업은 조선의 사회 분업을 토대로 발달하였다. 그런 까닭에 상업의 발달은 농업과 수공업, 광업 등 경제 전반의 성장에 기여하는 긍정적인 효과를 냈다. 그러나 일제가 조선을 식민지로 지배하면서 상업의 기능은 정반대가 되었다. 일제는 조선의 산업을 일본에 종속시켜 지배하고, 수탈하는 기구로 시장을 이용했다.
이로 말미암아 일제강점기 조선의 시장과 상업은 일본 상품을 조선의 구석구석에까지 침투시켜 토착 산업을 붕괴시키는 민족 산업의 파괴자로 변해 버렸고, 더욱 중요한 것은 일본 제국주의가 필요로 하는 쌀과 면화, 고치 등을 약탈해 일본 시장에 공급하는 수탈기구의 역할도 하게 됐다.
일제강점기 시장경제에서 일어난 가장 큰 변화는 일본 수출을 위한 쌀 거래가 비약적으로 증가한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일제가 부족한 쌀을 조선에서 수탈할 목적으로 산미증식 계획을 실시하면서 일어났다. 산미증식 계획에 의해 1920년대 후반의 경우 매년 조선에서 생산된 쌀의 4할 정도가 일본으로 수출됐다.
주변에 평야가 넓게 발달한 대구에서도 쌀의 수출이 빠르게 증가했다. 쌀은 경부선을 이용해 수출되었던 까닭에 대구의 쌀 시장은 대구역 주변에 형성됐다. 대구역 부근에는 수출용 쌀을 보관하는 대규모의 창고가 속속 건설됐고, 대구 상권의 중심도 서문시장에서 대구역 미곡시장으로 이동했다.
그러나 쌀 수출이 증가할수록 조선의 농가 경제는 도리어 몰락해 갔다. 일제가 시장이라는 기구를 이용해 농가 생산비에 훨씬 미달하는 가격으로 쌀값을 통제하였기 때문이다. 일제는 쌀값을 통제하는 대신 지주제를 육성하고 강화했다. 또 일제는 지주들이 보다 많은 소작료를 수탈할 수 있도록 정책적으로 뒷받침까지 했다. 지주의 수탈이 증가하면 쌀값이 저렴해도 일본으로 수출되는 쌀이 늘어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지주들은 고율의 소작료 덕분에 높은 수익을 올릴 수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시장과 상업이 조선의 민족 경제를 파괴하고 조선의 농업과 농민들을 수탈하는 기구로 바뀌게 한 것은 일제의 금융기관들이었다. 일제는 조선을 강점하면서 조선은행, 조선식산은행, 금융조합 등을 계통적으로 설립해 조선의 금융시장을 완전히 장악했다. 이 금융기관들은 조선으로 진출한 일본 기업가와 상인들에게 우선적으로 자본을 공급했고, 이들은 그 자금력을 바탕으로 조선의 상공업과 시장을 공략해 단기간에 장악할 수 있었다.
이윤갑 계명대학교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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