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김성미의 책속 심리] 회색노트/R.마르탱 뒤 가르 지음

올해 중학생이 된 정훈이는 부모님과 학습 클리닉을 찾아왔다.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밤늦도록 쏘다닌다'는 게 주문제였다. 어릴 때는 시키는 대로 잘 하던 아이가 중학생이 되면서 멋만 부리고, 학원에 안 가고 거짓말을 하고, 요즘은 부모와 아예 담을 쌓고 지낸다는 것이다. 어제는 담배 냄새를 풍기며 돌아온 아들을 아버지가 훈계하다가 급기야 매를 들었고, 아들이 악을 쓰며 대드는 바람에, 정말 이러다가 뭔 일을 저지를 것 같아서 도움을 청하러 왔다고 한다. "부족한 것 없이 다 해주는데, 왜 공부를 안 하는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며 아버지의 눈가에 눈물이 어린다.

아버지가 밖으로 나가시고, 정훈이가 말문을 열었다. "우리 엄마는 감시 카메라예요. 친구와 놀고 있으면, 10분마다 계속 전화하고, 학원 앞에서 기다리고, 아빠한테 일러주고. 가장 기분 나쁜 것은 내 친구들이 나쁜 애들이니 어울리지 말라는 거예요."

정훈이처럼 사춘기를 겪는 자녀와 심한 갈등으로 가슴앓이를 하는 부모님이 드물지 않다. 소설 도 이런 이야기다. 프랑스의 작가 마르탱 뒤 가르가 19년에 걸쳐 완성한 대하 장편 소설인 의 전 8부작 중 제 1부에 속하는 작품이다. 그는 이 작품의 후반에 속하는 으로 1937년에 노벨상을 수상했다.

아버지의 뜻에 어긋난 적이 없는 자랑스러운 형에 비해 둘째 아들인 자크는 엉뚱하고 빗나간 행동을 일삼아, 아버지의 명성에 먹칠을 하는 부끄러운 자식이었다. 부모에게 실망만 끼치는 무능한 아이라고 스스로 낙인찍은 자크는 친구 다니엘에게만 마음을 연다. 두 사람은 예민한 사춘기적 감수성을 교환일기를 주고받으며 둘만의 비밀스런 우정을 키워나간다. 하지만 어른들의 눈에는 이 '회색노트'가 불온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처벌이 두려웠던 두 사람은 무작정 가출을 하고, 다음 날 결국 경찰에게 붙잡혀 귀가조치 된다. 아버지는 자크를 더 이상 용서하지 못하고 불량 학생을 특별하게 훈육하는 감화원으로 보내버린다.

아이들은 세상에서 가장 잘 보이고 싶은 대상이 부모다. 그렇기 때문에 "너만 아니면 우리 집에 아무 걱정이 없겠다. 너 때문에 부끄러워 고개를 들고 다닐 수가 없다"는 식의 말은 자녀에게 가장 큰 상처가 된다. 부모가 자기에게 실망했다고 느끼는 아이들은 부모 대신 친구를 찾아 나선다. 친구를 실망시키지 않으려고 지나치게 신경을 쓰고 매달린다. 부모님이 친구를 비난하거나 어울리지 말라고 하면, 아이들은 매우 공격적으로 변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부모가 실망한 아이는 모든 것을 잃어버린다. 실패할까 두렵고 미래에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될까봐 겁이 난다. 점차 학습 동기가 저하되고, 결국 성적 저하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고3병과 더불어 중2병이 또 다른 문화병으로 떠오르고 있다. '자식을 불행하게 만드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자식에게 언제나 무엇이든지 가질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는 루소의 말처럼, 부모의 과잉보호와 감시는 아이들에게 상처를 주는 지름길이다. 히포크라테스 선서에는 '프리멈 논 노세레'(primum non nocere)라는 말이 있다. '첫째 해를 입히지 않는다'는 맹세다. 부모가 자녀에게 상처를 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부모로서 가장 먼저 해야 할 맹세가 바로 이것이 아닐까.

마음과마음 정신과의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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