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에세이 산책] 이런 장난질 치진 않겠지요

"또 비야?" 아침에 눈을 뜬 제 입에서 터져 나온 말입니다. 3월인데 눈비가 잦습니다. 바람도 차디찹니다. 며칠 전 서울 경기에 함박눈이 내렸습니다. 저 역시도 눈 때문에 서울 한복판에 갇힌 적이 있습니다.

목적지를 코앞에 두고 세 시간 반 동안이나 가다서다를 반복했습니다. 그날 저는 흐름에 순응하지 않으면 안 되는 수많은 자동차를 보았습니다. 핸들 위에 올려놓은 손이 참으로 무력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가속페달 위에 얹어놓은 발도 할 일이 없어진 건 마찬가지였습니다.

저는 하늘을 보고 막힌 차로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조바심쳐 봐도 상황이 바뀌는 건 없는데도 말입니다. 쉼 없이 달려온 뒤에 주어진 여유로움 정도로 생각하면 편할 텐데 마음 바꾸기는 생각만큼 쉽지 않았습니다. 결국 나를 힘들게 하는 건 내 속의 문제라는 걸 알았습니다. 어딘가에 갇힌 걸, 지루한 걸 참지 못하는 평소의 제 모습과 딱 마주쳤던 거죠.

그날 저는 마비된 도시에서는 나 자신도 마비될 수밖에 없음을, 함께 마비가 되어야 편하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마비되는 걸 거부하거나, 흐름을 미처 읽어내지 못한 자동차들이 서로의 몸을 치면서 파열음을 냈습니다. 뉴스는 온통 파열음에 상처 난 도로 위 소식뿐이었습니다. 저는 라디오를 껐습니다. 눈은 계속 내렸고 가로등이 하나 둘 켜졌습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시간에도 강원도 지역엔 눈이 내리고 있답니다. 자목련이, 개나리가, 산수유가 황급히 몸을 접겠지요. 화들짝 놀라는 봄꽃들이 안쓰럽습니다. 봄꽃에게 청심환이라도 먹여야겠다는 우스갯소리를 문우와 문자로 주고받았습니다.

우산을 챙겨 집밖으로 나왔습니다. 비가 내려도 눈이 내려도 황사와 바람이 휘몰아쳐도 봄은 오고 있습니다. 푸른 기운이 솟구치는 공원을 천천히 걸었습니다. 빗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선 산수유 몸속이 아름답습니다. 사시사철 마른버짐을 달고 사는 플라타너스의 태동도 시작되었습니다. 수액도 힘차게 끌어올리고 있습니다. 그 위에 손바닥을 댔습니다. 플라타너스의 몸속에도 사람처럼 피가 돌고 있는 게 느껴집니다.

날씨에게도 이렇게 밖에 할 수 없는 사정은 있겠지요. 지구의 몸이 병들었거나 쇠약해진 까닭인지도 모릅니다. 만약 그렇다면 자연의 일부인 우리에게도 책임은 있지 않을까요. 파헤치고 오염시켜온 공동책임 같은 거 말이지요. 자연이 앓을 때 함께 앓아주거나 항변할 입이라도 만들어 준다면, 자연도 우리에게 이런 장난질 치진 않겠지요.

임수진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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