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초기 낙동강 교두보는 우리나라 내륙의 전 국토 중 대구와 부산만 남겨둔 절체절명의 위기상황에서 단 한 치도 물러설 수 없는 최후의 마지노선(線)이었다. 피아 간에 병력과 장비를 총동원해 2개월 간 혈전을 거듭하며 사상 최대의 공방전을 벌인 것도 그 이유 때문이다.
이 기간 중 줄잡아 10만~15만명 이상이 낙동강을 피로 물들이며 수장되거나 이름 모를 모래펄과 산하에 무더기로 파묻혔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지 아무도 모른다.
정부의 공식통계로는 6·25 전쟁 발발 이후 휴전성립 때까지 3년 동안 아군 전사자가 유엔군 포함 18만2천775명이며 공산군은 중공군 90만명을 포함 총 142만명으로 집계되고 있다.
매일신문은 전쟁 발발 60주년을 맞아 영남의 젖줄인 '호국의 강' 낙동강 전투의 이면사(裏面史)를 발굴해 기획시리즈 '낙동강에 울리는 위령곡'을 25회에 걸쳐 연재한다.
프롤로그-스탈린의 탐욕
민족 상잔의 비극인 '6·25 전쟁'은 아직도 영원한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미국 CIA의 1급 비밀 파일 속에는 이오시프 스탈린(Joseph Stalin)과 마오쩌둥(毛澤東), 김일성(金日成) 등 이미 공개된 공산권의 3수괴(首魁) 외에 한국 전쟁을 일으킨 핵심 인물 5명이 리스트에 올라 있다.
그들은 각각 미국과 소련, 남북한의 국적을 가진 한국인 비밀공작 요원들이었다. 하지만 그 비밀의 퍼즐을 풀 수 있는 그들은 현재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미 유명을 달리했기 때문이다. 너무 오랜 세월이 흐른 탓이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볼 때 한국 전쟁은 스탈린의 탐욕에서 비롯되었다는 이야기가 지배적이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의 패색이 짙어가던 1945년 7월 17일 연합국에 가담한 스탈린은 '포츠담 선언'을 발표할 때 비로소 한반도에 대한 발언권을 행사하게 된다.
그는 포츠담 회담에서 아시아의 침략자 일본을 공략하자는데 의견일치를 보게 되자 자연스레 한반도 침공의 문이 열린다는 사실에 고무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스탈린의 음흉한 계략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던 우리 한민족은 일본의 패망과 더불어 조국 광복의 꿈이 이루어진다는 기대에 한껏 부풀어 있었다.
이에 앞서 같은 해 2월 11일에는 전후 처리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미·영·소 3국 수뇌가 회동한 얄타 회담이 열렸고 이 회동에서 스탈린이 대일(對日)참전을 약속하는 조건으로 러·일전쟁 이후 일본에 빼앗긴 극동의 지배권을 되찾는데 합의한다. 명분은 만주의 영토 회복이었으나 그 내면엔 한반도의 소비에트화(化)에 대한 야망이 도사리고 있었다. 스탈린이 한반도를 노린 것은 동북아와 동남아의 적화야욕을 충족시킬 수 있는 유일한 교두보이기 때문이다. 연합국은 '포츠담 선언'에 따라 장차 한반도에 통일 국가를 수립한다는 원칙하에 우선 군사적 조치로 38도선을 설정한다. 군사적 조치란 한반도의 이남에는 미군이, 이북에는 소련군이 진주해 일본군의 항복을 받아내고 당분간 군정을 실시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한반도는 어떠한 명분으로도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승전 강대국에 의해 두 쪽으로 허리가 잘리고 만다.
스탈린은 한반도의 전후 처리 문제가 이같이 결정나자 자신의 휘하에 있는 붉은 군대(赤軍) 제25군에 만주와 북한을 점령하기 위한 진격 명령을 내린다. 일본이 무조건 항복하기 이틀 전인 8월 13일 일방적으로 취한 군사적 조치였다. 소련군은 즉각 해방군이라는 명목으로 북한의 청진과 원산에 상륙하고 이어 광복 일주일 만인 8월 22일에는 평양으로 진주한다. 그리고 불과 보름 만인 8월말에는 38도선 이북을 완전히 장악하기에 이른다. 미군이 합법적으로 남한에 진주한 9월 9일에 비해 27일이나 빨랐다.
스탈린이 재빨리 북한을 점령한 것은 괴뢰 정권을 세우고 자유 진영인 남한을 공략하여 한반도 전체를 공산화하는데 목적을 두고 있었다. 이는 일본을 점령한 미국을 견제하고 태평양으로 진출하기 위한 일종의 계략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는 당시 25군 산하 비정규군인 88정찰여단의 꺼삐딴(대위)에 불과한 김성주(金成柱)를 북한괴뢰정권의 수반으로 과감히 발탁한다. 광복 이후 느닷없이 전설적인 '항일독립투쟁의 영웅인 김일성 장군'으로 둔갑하여 한반도에 피바람을 불러일으킨 '김일성(金日成)'을 말한다. 스탈린에 의해 전격적으로 간택된 그는 공산정권을 수립하기 전인 1946년부터 소련의 전폭적인 군사 원조로 조선인민군 창설부터 서두르며 급진적인 남침 준비에 광분하게 된다.
빨치산 시절부터 심복으로 따라 다녔던 이학구(전 인민군 13사단 참모장·총좌)에 따르면 1912년 평양 북방 대동군 고평리에서 태어난 김성주는 7세 때 부모를 따라 만주로 이주했다. 그의 아버지 김형직(1894~1926)이 평양에서 항일독립운동단체인 '조선국민회'를 결성해 활동하다가 일본 경찰에 붙잡혀 옥고를 치른 뒤 만주로 망명했기 때문이다.
1932년 20세로 성장한 그는 평소 병정 놀이로 우정을 다져온 또래들과 소규모의 '반일인민유격대'를 결성한다. 민족의식이 남달랐다기보다 옥고를 치른 고문 후유증으로 32세의 한창 나이에 세상을 뜬 아버지의 죽음이 큰 영향을 끼쳤다고 했다. 그 당시 만주에서는 조선 유민(流民)들의 반일 감정이 한결 같았고 자생적인 군소항일단체가 부지기수였다.
그러나 그의 '인민유격대'는 애초부터 일본인 거류민들을 상대로 살인과 약탈을 일삼다 토벌대와 맞닥뜨려 저항한 것밖에 없다는 것이 당시 그의 복무원(傳令)이던 이학구의 증언이다. 순수한 독립운동에 목적을 둔 항일 투쟁이 아니라 일종의 비적 행위나 다름이 없었다.
김성주는 1941년 자신의 밀영(비밀병영)이 일본군 토벌대에 발각되고 무한정 쫓기며 소련의 하바로프스크까지 달아난다. 그 당시 그가 거느린 유격대원은 80여명에 불과했다. 여기서 그는 붉은 군대 88정찰여단장인 중국의 전설적인 빨치산 대부 저우바오중(周保中) 대좌와 극적으로 재회하게 된다. 보천보(普天堡)전투 이후 4년 만이다.
보천보 전투란 1937년 6월 4일 저우바오중이 이끌던 '동북항일유격대'가 압록강을 건너 혜산진의 보천보를 습격할 때 그곳 지리에 밝은 김성주의 유격대원 50여명을 배속시켜 이른바 '항일연군(抗日聯軍)'을 편성, 일본군 수비대를 섬멸한 사건을 말한다. 이후 항일 투쟁이라는 명목으로 피비린내를 풍기며 노략질을 일삼던 그는 일본군의 대대적인 토벌 작전에 쫓기다가 저우바오중과 극적으로 재회한 것이다.
이를 계기로 붉은 군대와 인연을 맺은 김성주는 비로소 소련군 대위로 특임돼 자신의 인민유격대원들과 함께 88정찰여단에 배속되면서 대대급 규모의 부대를 지휘하게 된다. 이 부대는 스탈린이 일본의 점령지 만주를 평정하기 위해 저우바오중의 '동북항일유격대'를 모태로 중국 및 조선공산당원들을 모아 급조한 게릴라부대였다.
만주에서 비적으로 떠돌던 김성주가 보천보 습격사건을 계기로 저우바오중을 만난 것은 생애의 크나큰 행운이었다. 저우바오중이 아니었다면 훗날 세계공산주의의 맹주인 이오시프 스탈린을 만나지 못했을 뿐 아니라 북한공산집단의 수령이 될 수 없었을 테니까.
이용우(언론인·칼럼니스트)
※ 필자 이용우는
필자 이용우(70)씨는 중앙일보 사회부장과 편집부국장, 영남총국장을 역임한 언론인 출신으로 현재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입니다.
어릴 때 6·25전쟁을 겪은 그는 1971년 일선 기자 시절 당시 2군 사령관 채명신 중장(전 주월 한국군사령관)이 다부동 전적기념비(현 다부동 전적기념관 건립 이전)를 세우고 조촐한 제막식을 가졌을 때 현장을 취재하면서 관심을 가지게 됐다. 이후 그는 국군 참전용사들은 물론 북한 출신 반공포로(고위 군관)와 남로당 출신 빨치산, 미군 참전용사 등 수많은 증인들을 만나 인터뷰했고 6·25전쟁 자료 수집 및 발굴 등의 노력으로 이면사를 추적해오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논픽션인 '기자, 그거 아무나 하는 게 아니야' '100년 앞서가는 사람 이건희', 장편소설 '전쟁과 수녀' '혼돈의 세월' '어글리 양키즈'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악어를 잡아먹은 악어새' '붉은 수레바퀴가 남긴 상처' '진짜 실세, 가짜 실세' '독도탈환작전-귀신사냥 1·2부' 등 다수가 있다.
조두진기자 earful@msnet.co.kr
댓글 많은 뉴스
[단독] 경주에 근무했던 일부 기관장들 경주신라CC에서 부킹·그린피 '특혜 라운딩'
최재해 감사원장 탄핵소추 전원일치 기각…즉시 업무 복귀
"TK신공항, 전북 전주에 밀렸다"…국토위 파행, 여야 대치에 '영호남' 소환
헌재, 감사원장·검사 탄핵 '전원일치' 기각…尹 사건 가늠자 될까
계명대에서도 울려펴진 '탄핵 반대' 목소리…"국가 존립 위기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