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신히 흐린 날을 피했다고 좋아했더니 길 초입부터 진눈깨비가 흩날리기 시작했다. 손가락으로 쿡 쑤시면 금세 빗줄기를 쏟아낼 듯 잔뜩 찌푸리기만 할 뿐 더 이상 성질을 부리지 않았다. 용케 잘 참는다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취재 후 다음날 3월 중순으로 치닫는 날짜가 무색하게도 폭설이 퍼붓고 말았다. 하루가 늦었더라면 아예 길을 떠나지도 못했을 터. 작은 일에도 감사하며 살게 된다.
군위로 가는 길에 동행한 김종준 작가는 뜬금없이 이렇게 물었다. "군위는 뭐가 유명하지?" 한동안 골똘히 생각에 잠겼지만 군위 앞에 붙일 만한 수식어가 딱히 떠오르지 않는다. 오늘 걷는 길은 '위천 강둑길'이다. 위천이라. 자주 듣기는 했지만 어디에서 어디로 흐르는지도 가물가물하다. 결국 낙동강과 만나기는 하겠지만 도대체 어디서 발원했는지도 물음표다. 자료를 뒤적거려보니 꽤 놀랍다. 길이만 197.5㎞에 이른다. 군위군 고로면 낙전·학암리 일대 산지에서 시작해 의흥·우보·효령면과 군위읍을 서에서 동으로 가로지르다가 북으로 치달아 의성군 비안면에서 쌍계천과 합쳐진 뒤 상주시 중동면에서 낙동강이 된다.(지도 참조)
군위군은 '위천 테마탐방로'를 한창 조성 중이다. 고로면 화수리부터 소보면 사리리까지 61㎞ 구간에 탐방로를 만든다. 군위읍 내량교에서 중앙고속도로 군위나들목까지 5.3㎞ 구간(제1구간)은 이미 완성이 됐고, 올해 군위나들목에서 효령면 병수리 간동(병천교)까지 3.5㎞ 사업을 시작할 예정이다. 간동에서 의흥면 원산교까지 14.5㎞ 구간(제2구간)은 오는 7월 개통을 목표로 마무리작업이 한창이다. 나머지는 장기계획. 가볍게 걸을 요량이면 1구간을 택하면 좋고, 작정하고 하루 반나절 이상 걸어보려면 2구간으로 가면 된다. 재미없는 길 소개는 일단 끝! 걸으면서 다시 이야기를 시작하자.
산길이 아니어서 평탄했을 뿐 정말 많이도 걸었다. 군위읍내에서 68번 지방도를 따라 북쪽으로 잠시만 가면 중앙고속도로 아래를 지나 내량교에 이른다. 여기가 출발점이다. 위천을 거슬러 남쪽으로 체육공원이 보이고 아스팔트로 포장된 녹색길이 쭉 뻗어있다. 생태계를 복원한다며 시작했지만 자연친화적인 느낌이 많이 사라져 아쉬웠다. 황톳길을 만들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하지만 이곳은 여름철이면 물이 넘쳐 길을 망쳐버리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포장길을 택했다고 한다. 다만 강변에 빼곡히 자란 억새밭 사이로 난 산책길은 추천할 만하다. 청둥오리며 왜가리가 곳곳에 떼를 지어 먹이 찾기에 열심이다.
길 안내를 맡은 군위군 환경산림과 장범수씨는 "탐방길 주변 느티나무와 벚나무는 다른 지역의 도로 확장 때문에 버려질 나무를 옮겨 심은 것"이라며 "정성껏 탐방로를 만들었지만 아직 찾는 사람이 적어서 아쉽다"고 했다. 위천을 가로지르는 다리가 많지만 낡을 대로 낡은 사직잠수교는 옛 정취가 물씬 풍긴다. 강 건너편에 줄지어 늘어선 강태공들이 한가롭다. 제법 씨알 굵은 물고기가 잡힌다고 한다.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한 시간 남짓 걷고나니 군위나들목이다. 조형물 하나가 눈에 띈다. '삼국유사의 고장, 군위'. 단군신화를 처음 기록한 역사서이자 몽골 침입으로 굴욕을 당하던 시기에 민족 자주의식을 깨우쳐 주었던 삼국유사. 일연 스님은 장산군(현 경산) 출신으로 9세에 출가해 56세에 고려 원종의 부름을 받아 왕사(王師)가 됐으며, 77세에 승려로서 최고의 위치인 국존(國尊)에 책봉됐다. 자료뿐 아니라 전해오는 이야기를 소중히 여겼고, 직접 현장을 찾아가 확인했다. 일연 스님은 국존의 자리에 올라서도 연로한 어머니가 계시는 군위 인각사로 돌아가기를 원했다. 간절한 뜻을 꺾지 못한 충렬왕은 어쩔 수 없이 이를 허락했고, 스님이 내려온 이듬해 어머니는 96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한다. 일연 스님이 '삼국유사'에 굳이 '효선'(孝善:불교적인 선행과 효도에 따른 보답 이야기)을 둔 이유도 19세에 스님을 낳고 77년을 홀로 산 어머니에 대한 애틋한 정 때문이리라.
길이 계속 이어지면 좋으련만 군위나들목에서 간동 부근까지 도로를 따라 갈 수밖에 없다. 5번 국도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오다가 무성휴게소를 지나 800m쯤 더 가면 오른쪽으로 다시 탐방로가 시작된다. 병천교 조금 못 미치는 지점에서 위천은 남천과 합류한다. 최근 병천교 인근에 소고기 전문점들이 잇따라 들어서자 군위군은 일대를 유원지로 개발할 계획이다. 텐트를 칠 수 있는 제법 널찍한 강변 쉼터도 닦아놓았고, 강을 가로지르는 징검다리도 놓여있다.
여기서부터 위천은 동서로 흐른다. 아직 일반에 개방되지는 못했지만 의흥면까지 15㎞ 가까운 거리의 탐방로가 막바지 작업에 한창이다. 길이 끊어진 곳은 플라스틱 데크길을 만들었다. 오천교 조금 못 미치는 곳에 가면 임진왜란 때 의병장이던 장사진(張士珍) 장군을 기리는 사당이 길 왼편에 있다. 탐방로는 의흥면으로 이어지는 919번 지방도를 만났다가 헤어지기를 거듭하며 서쪽으로 쉼없이 간다. 한참을 걷다 보면 길이 끊어져 도로를 가로지르기도 하고, 우보면 소재지를 지날 무렵이면 중앙선 철길 아래를 지나기도 한다.
거기서도 5㎞ 남짓 더 가야 오늘의 목적지인 의흥면에 당도한다. 아름드리 벚나무가 빼곡한 탐방로에 들어서면 길은 막바지다. 위천을 가로지르는 이지교가 눈에 들어온다. 다리 건너 이지리(속칭 가지골)에는 '며느리 혼불' 이야기가 전한다. 그 옛날 집안의 불씨는 '가운'(家運)을 뜻했다. 불씨가 꺼지면 집안이 망한다 하여 며느리들은 자다가도 몇번씩 일어나 불씨를 살펴야 했다.
완고한 시어머니와 외아들 두 식구가 살던 가지골 한 집안에 16살 난 며느리가 들어왔다. 어렸지만 부지런했던 며느리는 농사일에도 열심이었다. 어느 날 고단한 나머지 며느리는 불씨 살피는 시간을 놓쳤고, 깜짝 놀라 화로를 헤쳐보니 불씨는 가물가물 사라지려 했다. 이를 알게 된 시어머니는 불씨를 살려내라며 며느리 머리채를 쥐고 흔들었다. 몇대를 이어온 불씨를 꺼트렸다는 죄책감에 시달린 며느리는 시집 올 때 친정서 가져온 옷가지를 불씨 위에 올려놓고는 결국 위천에 몸을 던지고 말았다. 억울하게 죽은 며느리의 원혼을 달래려 했을까. 죽어가는 불씨 위에 놓았던 옷가지에 불이 옮겨붙으며 불씨는 활활 되살아났다. 그 일이 있은 뒤 위천 건너 수북리(속칭 뒷골)에서도 깊은 밤에 가지골을 보면 마을 한가운데서 늘 희미한 불빛이 비친다고 한다. 사람들은 이를 '며느리 혼불'이라 불렀단다. 군위는 골골마다 이야기가 참 많은 곳이다. '삼국유사의 고장'이라는 애칭을 가져온 것도 이런 연유가 아니었을까 싶다.
글·사진=김수용기자 ksy@msnet.co.kr
도움말=군위군 환경산림과 장범수 054)380-6183, 도시과 이장영 054)380-6243
전시장소 협찬=대백프라자 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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