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3040 광장] 삼성을 다시 생각한다

봄 날씨가 여느 해와 다르게 변덕이 심하다. 대구에서 춘설을 보는 일은 호사였지만 추위가 오래가서 걱정이 많았다. 날씨가 변덕이 심하면 어르신들의 건강과 어린애들 건강, 그리고 거처가 없는 이들의 잠자리가 신경 쓰이게 된다. 올봄에도 주변의 궂은 소식을 접하게 되었고 그러면 괜스레 마음 한구석이 허전해지고 미안한 마음이 생긴다. 그래서 허전한 마음 위로받고 싶어 꽃구경이라도 하고 오는 날에는 오히려 애잔함만 더해진다. 꽃은 피기도 어려운데, 아름답기는 얼마나 어려운지…. 봄비며, 봄바람이 꽃을 그냥 놔두지 않는다!

나는 봄이 되면 으레 꽃을 보러 다니다 꽃망울 몇 개 따는 욕심을 부린다. 올봄에도 눈으로만 보기엔 아까워 욕심부려 매화 한 송이 따다 뜨거운 물에 우려 마셨더랬다. 신기하게도 꽃 향기에는 추억이 묻어난다. 함께한 이들이 그리워지고 괜히 슬퍼지고. 올해 마신 매화차에서는 유독 슬픈 기억이 많이 떠올랐다. 마침 이건희 전 회장의 삼성 복귀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우리 지역의 야구장 문제 때문이었는지. 올해 유독 지역에서 삼성 관련 뉴스가 많이 나왔기 때문인지 삼성이 생각났고 슬펐다.

필자가 일하는 단체에서는 소비자들의 피해 구제나 집단소송과 같은 일을 업무의 한 부분으로 하고 있다. 꽤 오래전에 삼성이 대구에 상용차 공장을 만든 일이 있었다. 대기업의 지역 입주에 어려운 대구 경제의 회생에 대한 희망과 고향에 돌아온 기업에 대한 지역민들의 사랑이 더해져 지역의 분위기는 들떠 있었다. 하지만 희망도 잠시, 회사 설립 4년 만에 삼성상용차는 파산하게 된다. 삼성상용차에서 생산한 '야무진'이란 이름의 화물차를 지역민들은 삼성이라는 브랜드를 믿고 구입했었다. 하지만 4년 만에 회사가 파산하게 되자 소비자들은 당장 사소한 부품 하나도 구하지 못해 애를 먹게 되었다. 작은 사고로 사이드미러가 깨져도 부품을 구할 수 없게 되었고 소비자들은 해결책을 요구했다.

필자가 일하는 단체는 당시 '삼성상용차 소비자피해대책모임'의 사무국을 맡아 그분들의 얘기를 들을 기회가 많았다. 때로는 서울 삼성 본사를 찾아가거나 과천 정부종합청사를 찾아가 피해대책 마련을 요구했지만 법적 책임이 없는 삼성과 정부에서는 책임 없다는 답변만 돌아왔다. 피해자들의 딱한 사정이 방송국과 언론사를 통해 알려져 시민들 사이에선 삼성이 책임져야 한다는 여론이 강했지만 도의적 책임보다 법적 책임이 우선했다. 오랜 시간의 싸움에서 지친 건 결국 시민들이었다. 삼성이라는 기업 이미지를 믿고 신규 자동차를 구입했지만 결국 그 회사는 삼성과 무관하다는 법 논리만 내세웠다.

이 과정에서 삼성상용차의 대구 입주 과정에 특혜를 제공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고 지역을 이용한 게 아니냐는 목소리가 거셌지만 결국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생계를 위해 삼성상용차를 구입한 소비자만 피해를 입었을 뿐.

당시 대구경북 대책모임에서 활동하던 한 분과는 인연이 있어 이런저런 이유로 연락이 지속되었다. 그러던 지난해 어느 날 그분의 부고 소식을 들었다. 불과 몇 주 전에 통화를 했었는데 자살이라니. 물론 단순히 당시 사고만이 문제는 아니었겠지만 희망과 정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사시던 분에게 그 사고가 절망과 두려움을 안겨줬으리라는 것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이 봄! 삼성은 나에게 그렇게 남겨진 기업이다.

삼성의 창업주를 기리는 행사가 지역에서 자발적으로 이뤄지고 '리치 로드'란 이름으로 삼성의 길에 이야기를 부여하면서 행여 삼성이 대구에 올까 잔뜩 기대하며 프로야구에서 삼성이 이기면 여전히 신나는 대구경북 지역민들의 삼성에 대한 사랑은 변함이 없다.

하지만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하는 진실은 삼성은 지역보다 기업 이익이 우선이며 회사를 자식에게 물려주고 세금을 덜 내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으며 삼성 야구단이 주로 사용하는 야구장도 지을 의지가 없다는 점이다.

기업 유치가 지역 경제 회생과 지역민의 삶의 질 증진을 위한 정책이라는 것에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기업을 모셔 오려는 이유가 시민을 모시기 위해서란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시민 위에 있는 기업은 오히려 독이 될 수 있다. 아울러 무리하게 돔구장을 짓겠다고 기업과 거래를 하는 일은 보다 신중해야 한다.

내년 봄, 다시 꽃이 필 때 시민들의 얼굴에 미소짓게 하는 예쁜 기억 하나쯤 만들어줄 가슴 따스한 정책을 기대해 본다.

안재홍 대구녹색소비자연대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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