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여행, 풍경과 함께] 미얀마 바간

걸음마다 유적지 '탑들의 고장'

양곤 도심에서 조금 벗어난 미까사 호텔은 수영장을 갖춘 제법 규모가 큰 호텔이다. 아담한 거실과 부엌, 세면장이 딸린 2개의 방을 갖춘 70㎡(20여평) 정도의 콘도 수준이다. 하루 방값이 100달러지만 여럿이 사용할 수 있으므로 그리 큰 부담은 아니다.

아침 일찍 바간으로 가는 국내선을 예약해 놓은 터라 미리 호텔 프런트에 시간에 맞춰 공항 갈 택시를 대기시켜 달라고 부탁해 놓았다. 호텔서 공항까지는 택시로 20여분 남짓 걸린다. 바간으로 출발하는 비행기를 타러 공항으로 걸어 나오다 깜짝 놀랐다. 오지여행 경험이 많지는 않지만 비행기가 당최 불안한 모양새다.

쌍발 40인승 프로펠러 비행기는 정면 옆 부분에 청색 테이프를 손바닥 3배쯤 되는 넓이로 붙여 놓았다. 비행기에 오르자마자 기내에 하얀 연기가 자욱했다. 깜짝 놀라는 여행객들에게 승무원은 에어컨에서 나오는 성에이니 걱정 말라며 안심시켰다. 내가 앉은 의자는 좌석을 고정하는 나사가 반쯤 풀렸는지 몸을 움직일 때마다 의자도 같이 따라 움직였다. 후배가 앉은 옆 좌석에는 아예 안전벨트가 없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에 따라야 한다지만 사정이 너무 열악했다. 다행히 바간까지 가는 한 시간 정도의 비행은 우려와 달리 편안했으며, 착륙도 사뿐했다. 서양인이 대부분인 탑승객들은 착륙과 동시에 모두 박수를 쳤다. 걱정되고 긴장하기는 나와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특이하게도 이곳 바간은 지역 전체가 유적지라서 따로 입장료를 받는 데는 없다. 비행기로 오는 경우에는 비행기 요금에 입장료를 포함시키며, 육로를 이용할 경우에는 바간 입구에서 입장료를 받는다고 한다. 공항 밖으로 나오자 제법 이른 아침인데도 불구하고 많은 현지인들이 나와서 차량과 가이드 등에 대해 흥정하고 있었다. 그 중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가죽점퍼와 론지를 입은 현지인과 하루 30달러에 모든 일정을 돌기로 하고 차에 올랐다. 영어도 제법 구사할 줄 아는 '묘'라는 이름을 가진 친구인데, 27세에 벌써 자식이 둘인 가장이었다.

바간은 캄보디아 앙코르와트, 인도네시아의 보도부드르 사원과 함께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 3대 불교 유적지 중 한 곳이다. 탑들의 고장이자 칠기를 비롯한 수공예품의 생산지로 미얀마 최고 관광지이다. 11세기에서 13세기까지 버마족 바간 왕조의 수도였다. 원래 5천여개의 사원과 탑들이 있었지만 몽골의 침입과 1975년 발생한 지진으로 많은 부분이 훼손돼 지금은 약 2천300여개의 사원과 탑들이 보존돼 있다고 한다.

올드 바간 지역은 대부분 1천여년 전 그대로의 모습으로, 도로 포장이 전혀 안 된 모래길이다. 유적지 군데군데 현지인들이 움막을 짓고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다.

아난다 사원은 바간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원으로 보존도 잘 돼 있다. 본당의 한쪽 면 길이가 53m나 되고, 중앙에 높이 9.5m의 불탑이 있으며, 서쪽 입구에는 균형미가 뛰어난 부처의 커다란 족적 두개가 있다. 히말라야에 있는 난다뮬라 동굴사원을 본떠 세웠으며, 사원 이름은 부처님의 시자인 아나존자에서 유래됐다고 한다.

사원 안에 동서남북으로 도는 3개의 길이 있는데 안쪽은 왕이 다녔던 길이고, 중간은 귀족들이, 바깥쪽은 서민들이 다녔다고 한다. 입구 기념품점에서 이곳 남자들의 전통 복장인 치마 비슷한 론지를 샀다. 론지를 입을 때 내의는 입지 않는다고 해서 나도 내의를 벗고 묘가 시키는대로 허리에 둘러 끼웠지만 혹시 흘러내릴지 않을까 내내 허리춤에 손을 대고 다녔다. 어느 정도 입고 다니다 보니 론지가 참 편하며 위생과 건강에도 좋다는 현지인들의 말을 실감할 수 있었다. TV에서 볼 때는 론지를 가난한 나라의 의상 정도로 여겼는데 막상 입어 보니 환경이 문화를 만든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었다. 이곳에서는 부유한 사람들도 론지를 즐겨 입는다고 한다.

다음으로 찾은 곳은 술레마니 사원이다. 불화가 원형으로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곳으로 석가의 제자들과 깨달음을 얻은 자들의 모습이 6개 층에 걸쳐 벽화로 구성돼 있다. 출입구는 사원의 4면으로 각기 5개씩 모두 20개가 있다.

이른 아침부터 빈속으로 돌아다니다 보니 어느새 해가 중천을 지나고 있다. 묘에게 경치 좋고 근사한 식당으로 안내를 부탁하니 이리와디강을 바로 옆에 낀 식당에 차를 세웠다. 강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야외 테이블에서 미얀마 맥주로 허기를 면한 뒤 닭고기 요리 등 맛있는 음식과 여유로움으로 여행가의 호사를 누렸다.

식사 후 커피를 들고 강변을 따라 조금 걸어 올라가니 바간에서 가장 오래된 탑으로 유명한 부파야 사원이 나온다. 황금색으로 칠해진 탑은 강변에 우뚝 솟아 있어 과거 강을 오가던 배들의 등대 역할을 했다고 한다. 바간의 경치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민예공 사원으로 가서 비좁은 통로를 올라 테라스에 올라서니 바간의 넓은 평원이 훤하게 펼쳐졌다.

탁 트인 가슴을 안고 쉐지곤 파고다로 항했다. 쉐지곤 파고다는 버마를 통일한 아노라타가 11세기 중반에 건립한 것으로 큰 규모와 화려함을 자랑한다. 부처님의 치아사리를 등에 싣고 다닌 코끼리가 멈춰선 자리에 지었다고 한다. 바간에서 가장 아름다운 불탑으로 꼽히는 쉐지곤 파고다는 미얀마 불탑의 전형답게 금박으로 덮여 있으며, 내부에는 석가모니의 치아와 뼈가 보관돼 있다. 첨탑 꼭대기에는 보석이 박혀 있고, 그 아래로 부처님의 전생에 관한 이야기를 부조로 표시했다. 탑 주위에 많은 금박을 붙였으나 흘러내리지 않고, 우기에 아무리 비가 와도 사원 경내에는 물이 차지 않는다고 하니 참 신기했다.

마누하 사원은 17세기 바간왕조의 아노라타왕이 몬족의 왕으로 있던 마누하왕과의 싸움에서 승리하고 그를 잡아와 짓게 한 사원이다. 사원 안에는 대형 불상 3개와 대형 와불상 1개가 있는데, 통로가 너무 좁아 한사람이 겨우 지나갈 정도다. 마누하왕이 전쟁에 패해 감옥에 갇힌 것을 상징한 것으로 보인다. 사원 밖에는 조그만 사당에 마누하왕과 왕비의 정령이 따로 모셔져 있다.

다시 바간 공항으로 돌아와 묘에게 계약한 금액 30달러를 지불했다. 미얀마에서는 차에 대한 관세가 엄청나게 높아 어지간해서는 서민이 자동차를 갖기가 어렵다. 자동차로 영업하는 묘는 그래도 꽤나 부유하게 살아가는구나 하고 생각했더니 차주는 따로 있다고 했다. 관광객과 흥정을 해서 합의한 최종 금액을 차주에게 전화로 일러주고 차주가 그 금액에 동의하면 거기서 10%를 묘가 챙긴다는 것이다. 오늘 하루 묘가 일해서 가져가는 돈은 고작 3달러인 셈이다. 아무리 국민소득이 낮다고 해도 부인과 2명의 자녀를 거느린 가장으로서는 너무나도 부족한 금액이 아니겠는가. 건네 준 30달러 외에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은 채 맑은 웃음으로 마지막 인사를 하고 돌아서는 묘의 어깨가 너무나 무거워 보였다. 뒤따라가서 10달러짜리 한장을 그의 손에 쥐여준 뒤 얼굴도 보지 않고 공항으로 뛰어왔다. 목 메인 듯한 묘의 "쌩큐, 쌩큐" 소리를 뒤로 한 채.

황병수(영남대병원 방사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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