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구활의 고향의 맛] 막걸리

막걸리 잔 앞에 놓고 옛 추억 더듬네

막걸리란 소리만 들어도 기분이 좋아진다. '한잔 마시고 싶다'는 혀의 유혹도 유혹이려니와 그 소리를 들을 적마다 안테나를 툭툭 치며 들어오는 옛 기억들이 머릿속 화면에 가득 펼쳐지기 때문이다. 막걸리는 내 추억의 영화관에서 상영되는 단골 메뉴 중에서도 단연 일급이다.

어머니가 기독교 신자여서 우리 집에는 술이 없었다. 어느 누군가의 입에서 '술'이란 말만 튀어나와도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불경이었고 죄악이었다. 또래들이 '공굴'(콘크리트 다리) 밑이나 방천둑 옆 '움턱골'(땅이 깊게 파여진 곳)에 모여앉아 화제가 궁할 때마다 나오는 소리가 "니 막걸리 묵어 봤나"였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그래 묵어 봤다"였지만 나는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러면 대장 격인 아이가 "그래 활이는 놔두고"라고 끝을 맺지만 그것이 나에게는 왕따로 느껴졌다.

#아이들, 심부름 하며 조금씩 맛봐

아이들은 막걸리 심부름을 할 때마다 주전자에 입을 대고 몇 모금 빨아먹는 재미를 자랑스럽게 얘기하곤 했다. 그러면 어떤 아이들은 "너무 빨아 술이 모자라면 맹물을 약간 타도 술 취한 아버지가 모른데이"라고 한 수씩 가르쳐 주기도 했다. 그럴 적마다 '아버지가 살아 계셨더라면 이런 수모는 당하지 않았을 텐데'라는 생각이 들어 네 살 때 돌아가신 아버지가 그렇게 원망스러울 수가 없었다.

어느 해 여름이었다. 학교에서 돌아와 책 보따리를 풀고 나니 감나무 밑 살평상에 낯선 손님이 앉아 있었다. 어머니는 "못 도감님이시다. 인사드려라"고 말씀하셨다. 그러고는 빈 주전자를 내 주시며 "얼른 가서 막걸리 한 되 받아 오너라"고 시키셨다. 하나님이 화내실 일을 어머니 스스로가 저지르다니. 못 도감이 센 줄 그때 처음 알았다.

#어머니가 술 대접한 못 도감

당시 농촌에는 힘세고 무서운 사람이 세명 정도 있었다. 밀주 감시원, 못 도감, 산감(山監) 등이 그들이다. 이들은 사법권까지 있었는지 감춰둔 밀주와 생솔가지를 뒤지고 다녔으며 물꼬 트는 권리를 쥐고 있는 못 도감은 화투판의 오야붕이 '화투 패 돌리듯' 제멋대로 물길을 돌리는 횡포를 부렸다.

어머니가 성경에 씌어 있는 말씀을 어기면서까지 어린 아들에게 주전자를 내 주신 까닭은 '마른 논의 물' 때문이었다. 어머니가 농담 삼아 더러 "넌 커서 뭐가 될래"라고 물을 때마다 내가 머뭇거리자 "못 도감이나 되었으면 좋겠다"고 하신 그 뜻을 그때는 몰랐다. 주전자를 들고 오면서 한 모금 빨아 봤으면 하는 강한 충동을 느꼈지만 못 도감의 권세에 눌려 꾹 참았다.

#굵은 소금 안주만 있어도 맛나는 술

고향 동네에는 술도가에서 술을 배달하는 딸기코 아저씨가 있었다. 마음이 워낙 좋아 그가 가게를 지킬 땐 아무에게나 "한 잔 하소" 하고 술잔을 내밀었다. 안주래야 '국케'(바다 진흙)가 섞인 굵은 소금이 전부지만 한잔 술이 고픈 모주꾼들이 수시로 기웃거렸다. 그는 자주 쫓겨났지만 그가 떠나면 손님들의 발걸음도 멀어져 떨어진 모가지가 다시 붙곤 했다. 딸기코 아저씨는 술을 싣고 가다가 땀을 뻘뻘 흘리며 오르막을 올라오고 나면 주머니 속의 놋잔으로 술통의 술을 부어 한잔씩 마셨다. 지금 생각해도 그 모습은 고향 하늘가에 피어오른 대 자유인의 초상이었다.

벌써 날이 어두워지고 있다. 하루의 부록과 같은 석양주 마실 시간이다. 막걸리잔 앞에 놓고 잠시 고향을 다녀와야겠다. 딸기코 아저씨와 제법 잘 차린 주안상에 마주 앉아 한잔 했으면 좋으련만 그는 이승에 없다.

구활(수필가 9hwal@hanmail.net)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