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끝나지 않은 6·25] (2)폭풍 전야

北 20만명 38선 배치할 때 남한 전체 군·경찰 다 합쳐야 10만명

6·25전쟁 발발 후 서울로 진격한 인민군들이 서울 시내를 행진하고 있다.
6·25전쟁 발발 후 서울로 진격한 인민군들이 서울 시내를 행진하고 있다.
6·25전쟁 발발 일주일 전 의정부 북방 38도선 지역에서 딘 애치슨(가운데) 미국 국무장관과 신성모(오른쪽에서 두번째) 국방장관이 북한 지역을 살펴보고 있다.
6·25전쟁 발발 일주일 전 의정부 북방 38도선 지역에서 딘 애치슨(가운데) 미국 국무장관과 신성모(오른쪽에서 두번째) 국방장관이 북한 지역을 살펴보고 있다.

1950년 6월 24일 밤.

안개 자욱한 북위 38도선 중부전선 북방한계선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폭풍 전야의 고요랄까, 이따금씩 풀벌레 소리만 들려올 뿐 사위는 무성한 수림에 가려 무거운 정적만 가라앉아 있었다.

6월 9일 조선인민군 최고사령부가 북한 전역에 분산 배치돼 있던 전 병력과 장비를 38선 북방으로 이동배치하기 위해 발령한 암호명 '번개작전'은 23일 정오를 기해 상황이 종료되었고 일선 전투부대는 일제히 비상경계령에 돌입해 있었다. 최일선에 배치된 군사군관(보병장교)과 일반전사(전투병)들은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잡초더미를 개인호로 삼아 남쪽을 향해 충혈된 눈동자를 굴리고 있었으나 주룩주룩 쏟아지는 빗줄기를 피할 곳이 없었다. 그들은 오직 싸늘한 총구를 겨냥한 채 공격 명령만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38선 전역에 전진배치된 조선인민군 전력은 전선 사령부 예하 2개 집단군(군단)의 7개 보병사단과 제105탱크여단, 38경비여단, 제766군 유격부대. 이들 대규모의 전투부대가 38선으로 전개하기까지 꼬박 2주일이 걸렸다. 주력 전투부대는 제1보병사단이 남천에서 문산 구화리 방면, 2사단은 함흥에서 화천, 3사단은 평강에서 운천, 4사단은 진남포에서 연천으로 이동했으며 5사단은 나남에서 양양, 6사단은 사리원에서 개성, 7사단은 원산에서 양구, 105탱크여단은 평양에서 연천으로 각각 이동을 전개해 공격 대형을 이루고 있었다.

이들 전투부대 중 특히 주목할 것은 중부전선의 제3사단과 4사단이 강력한 돌격사단으로 105탱크여단과 함께 최선봉에서 서울로 진격하게 돼 있다는 점이다. 예비 병력은 해주에 제12사단, 간성에 8사단, 회령에 15사단, 신의주에 13사단, 숙천에 10사단, 평양에 17탱크연대를 제2선에 이동, 배치해 대기 상태에 돌입해 있었다. 이들 전투부대도 앞으로 전개될 상황에 따라 일선으로 출동하게 된다.

주요 전투장비는 신막과 평강기지에 계류 중인 소련제 IL-10 경폭격기와 야크(Yak)-9 전투기, 정찰기 등 각종 항공기 200여대를 비롯해 T-34 탱크 240여대와 자주포를 장착한 서머호트 150대, 경기관총으로 무장된 모터사이클 560대에 트럭과 치스차(지프) 등 각종 차량들로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여기에다 122밀리 곡사포와 105밀리 박격포, 76밀리 직사포(일명 스탈린포) 1천600여문 등 실로 가공할 소련제 중포들로 무장해 있었다. 이른바 조국해방전쟁(남침 작전)에 선두 주력으로 나서게 될 T-34 탱크 중 100여대는 이미 1945년 8월 13일 소련군이 만주를 거쳐 해방군으로 진주할 때 들여와 고스란히 조선인민군 창설 장비로 넘겨준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 140여대는 최근에 도입된 최신형 탱크로 막강한 전력을 과시하고 있다. 소련은 당초 10개 사단 규모의 풍부한 전투장비를 북한 정권이 수립되기 7개월 전부터 전폭적인 군사 원조로 제공했다.

여기에다 통신·수송·정치보위부 등 지원부대를 포함한 전체 전투병력 만도 줄잡아 20여만명. 이미 남반부 깊숙이 침투한 남파 유격부대와 후방 교란의 전위대인 남로당 혁명무력을 포함할 경우 25만명 이상의 대병력을 헤아리고도 남는다.

그러나 남한은 전투 병력의 경우 육·해·공군에 경찰 병력까지 다 포함해도 줄잡아 10만명 남짓했다. 게다가 북한공산집단이 남파한 게릴라와 남로당의 공비들이 끊임없이 침투하여 후방을 교란해온 데다 대구 10·1사건과 제주 4·3사건, 여수·순천의 제14연대와 대구 제6연대의 군사반란사건 등이 잇따라 터지는 바람에 숙군(肅軍)작업도 병행하느라고 미처 군비를 축적할 여유가 없었다. 게다가 미국은 한국에 군사 원조를 제공하면 북진할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M-1 소총이나 기관총 등 기본 무기마저 제공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전체 9개 사단과 1개 독립연대 중 이들 반란세력과 공비소탕을 위해 4개 보병사단을 후방에 고정배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방에 대한 증원은커녕 일선에 배치된 실병력은 서울을 방어하는 수도사단을 제외한 4개 사단과 1개 독립연대에 불과했다. 38선 경비에 구멍이 뚫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장기적인 공비 토벌과 진압 작전으로 일선 장병들에 대한 교육 훈련은커녕 기존의 전력마저 상당히 약화돼 있었다.

전투 장비는 소총·기관총 등 개인무기를 제외하고 자주포는 단 1문도 없었고 대전차포 140문, 박격포 960문, 곡사포는 89문에 불과해 적과는 아예 상대가 되지 않았다. 개전 초기 대구·부산을 제외한 우리나라 전 국토를 초토화 시킨 기갑병기의 경우 적은 소련제 T-34탱크 242대로 중무장했으나 아군은 단 한 대도 없었고 장갑차도 적의 절반 수준인 27대만 보유하고 있었다. 게다가 항공기는 비무장 경비행기 24대 뿐이었다.

이런 가운데 신성모(申性模) 국방장관과 채병덕(蔡秉德) 육군참모총장은 육군본부 참모진과 일선 사단장급의 인사이동을 6월 10일자로 전격 단행한다. 이 때 육군본부 작전국장 강문봉(姜文奉) 대령은 본인의 의사와는 전혀 관계없이 미 육군참모학교 고등군사반 유학이라는 명분으로 대기발령을 받았다. 비상시국에 육군본부 작전국장은 잠시도 비워둬서는 안 될 중책인데도 불구하고 인사발령 당시 후임자가 없었다.

강 대령은 38선의 방어진지 구축을 위한 국방 예산을 타내기 위해 애쓰다가 국회에서 비토당하자 이에 반발해 항의소동을 벌인 것이 괘씸죄에 걸려든 것이다. 게다가 일선 사단장도 서부전선을 지키는 제1사단장 백선엽(白善燁) 대령과 호남지방에서 공비토벌 중인 제5사단장 이응준(李應俊) 소장을 제외한 나머지 5개 사단장을 모두 교체하고 말았다.

여기에다 갓 부임한 일선 사단장들이 지휘권 장악을 위한 업무 파악에 나서고 있던 6월 22일에는 그동안 줄곧 지속돼 왔던 비상경계령을 갑자기 해제했다. 어이없게도 적의 6·25 남침 사흘 전에 취한 조치였다. 비상경계령이란 적의 도발 징후가 위험한 단계에 와 있다고 판단되었을 때 전군이 방어태세에 돌입하는 비상조치가 아닌가. 상대적으로 아군의 방어태세가 허술해 불안하기 짝이 없는 데도 느닷없이 비상경계령 해제라니 석연찮은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뭔가 알 수 없는 음모가 진행되고 있는 것 같았다.

호시탐탐 남침의 기회만 노리고 있는 북한공산집단은 1949년 한 해 만도 모두 73회에 걸쳐 중대·대대 규모의 국지전을 도발해 왔다. 같은 해 4월부터 5월 사이에는 두 차례나 대대 병력으로 개성지구를 공격해와 피아간에 치열한 국지전을 벌이기도 했다. 또 5, 6월 사이엔 육군본부 직할 제17독립연대가 포진해 있는 옹진반도에 적이 중대·대대 병력으로 3차례나 기습해와 치열한 교전 끝에 격퇴시킨 일도 있었다.

이밖에 같은 해 8월에는 춘천지구에 적이 대대 병력으로 기습공격을 감행해오다가 아군 제6사단 7연대의 조직적인 반격으로 섬멸되기도 했다. 아군 6사단의 경우 9, 10월 두 달 동안 북괴군 3사단과 자그마치 67회의 국지전에서 적 374명을 사살하고 부상 668명, 포로 8명의 전과를 올렸다. 적의 끊임없는 국지적 도발은 전면남침을 앞두고 다분히 아군의 전력을 탐색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었다.

이용우(언론인·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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