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근대미술 산책] 은행이 있는 거리

그 속으로 '의혈단 폭탄의거' 짜릿한 긴장이…

인상파 화가들이 화면에 빛을 표현하는 것과 도시화된 생활양식의 이모저모를 그리는 데 몰두했듯 대구의 초기 근대 화가들도 괄목할 만한 신식 건물들과 점차 번화해가는 거리 이곳저곳을 화폭에 담는 데 열중했다. 그런 곳 중 대부분은 이미 그 모습이 바뀌어버렸고 지형마저 완전히 달라져 어렴풋하게 짐작만 할 뿐인데, 이 그림만은 당시 조선은행 대구지점으로서 건물의 명확한 정체성과 분명한 장소를 알려준다.

이 건물의 이미지는 대구의 옛 사진 속에서도 발견되는데 당시 일제의 대표적인 건축 양식을 꾸밈없이 있는 그대로 재현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지만 기계적으로 충실하게 옮긴 복사판은 물론 아니다. 작품은 단지 의미의 지각만 전달하는 무형식의 물질이 아니라 표현력의 지배를 받아 선과 색채로 파악한 형식미를 띠게 된다.

우아하고 세련된 석조 건축의 외양이 작품의 모티프로서 그림의 전체 인상을 지배하는데, 특히 흰 벽면과 대비되는 암녹색의 매력적인 지붕 모양에 눈길이 간다. 건물 전체의 형태를 조망하려고 대상과 멀찍이 거리를 둔 채 약간 올려다본 시각의 구도로 포착해 시종 차분하고 세심한 주의력으로 그려 나갔다. 그래서 건물 자체에 대한 관심이 풍경의 일부로 취급된 것 이상으로, 그림의 중심 주제로 부각됨을 의식하게 한다.

바로 이곳에서 일어났던 한 역사적인 사실을 그림의 배경으로 직접 연관짓기는 쉽지 않다. 그렇다고 당시 일제를 초긴장에 빠뜨린 의혈단 장진홍 의사의 사건을 떠올리지 않고 이 작품의 의도를 고려하기도 힘들다. 1927년 작가의 첫 수채화 개인전이 있었던 그해 10월에 일어난 폭탄사건은 그 무렵 조선은행과 같은 기관이 일제의 식민지배 체제에서 차지하는 역할의 위상을 나타낸다. 그런 권위에 어울리는 외관이 식민지 젊은 화가의 눈에도 그저 당당하고 아름답게만 비쳤을까. 장 의사는 1930년 사형 확정을 받은 후 스스로 자결했으니 그때 나이 35세였다고 한다. 이 그림에 적용된 엷은 채색과 간결한 묘사, 단순한 구도 등으로 미루어볼 때 제작시점은 그 두 사건의 사이로 짐작하게 한다. 서명에 사용된 T.c.Su.도 이 연도를 뒷받침해 늦어도 1930년대 초를 넘지 않았을 것이다.

건물의 독특한 외관에 대한 피상적인 흥미에 이끌렸던 것만이 작품의 동기가 아니란 짐작을 하는 데는 또 다른 이유도 있다. 그 1927년 겨울에 중요한 한 모임이 결성되는데, '영과회'란 이름의 그 단체는 이듬해 봄 대규모의 전시회를 개최한다. 일경의 감시가 따랐다는 추측이 있지만 구성인들의 이산으로 3회를 넘기지 못하고 끝난 그 모임에 자주적인 민족의식을 지닌 다수의 인물이 포함돼 있어 당시 문화계의 분위기를 짐작하게 한다. 그런 와중에 작가는 소재에서 감각적인 것 이상의 의미를 찾으려는 노력을 강화했을 수 있다.

다시 그림으로 돌아가 보면, 화면 어디에서도 이런 이야기를 직접적으로 전달하지는 않지만 관객의 상상력은 자꾸 그런 역사적 아우라의 주위를 맴돌게 한다. 맑게 갠 하늘과 투명하게 비치는 창의 반사는 분명 한낮의 일광인데도 강렬한 빛의 산란을 느낄 수 없다. 자연히 감각적인 활기도 적다. 행인도 없는 텅 빈 도로를 걷는 두 남녀의 호젓한 모습 외에는 정적이 감도는 분위기에서 공허하고 쓸쓸한 기분을 느끼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작가 소허 서동진

은행이 있는 거리

종이에 수채

31.5×43.4㎝

1920년대 후반

개인(정활애) 소장

김영동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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