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매곡초등학교(교장 신호성) 2학년 3반 아이들은 학교에서 일기를 쓴다. 집에서 있었던 일을 써도 되지만, 특별한 일이 아니면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쓰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이른바 '학교일기'인 셈이다.
◇일기 쓸 거리가 없는 까닭
이 학교 아이들이 학교에서 일기를 쓰기 시작한 것은 올해 새 학기부터다. 2학년 3반 담임 김견숙 교사는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일기를 써오지 않는 아이들을 자주 보았다. 선생님의 꾸중을 들으면서까지 일기를 쓰지 않는 이유가 뭘까, 아이들에게 이유를 물었더니 '쓸 말이 없는데, 억지로 쓰려니 쓸 수가 없었다'는 대답을 들었다"고 했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거의 모든 일과를 보낸다. 초등학교 1, 2학년도 오후 1시쯤 돼야 귀가한다. 4, 5학년이 되면 오후 4시가 넘어야 귀가하는 경우도 많다. 친구들과의 미묘한 갈등, 선생님의 꾸중, 준비물 문제, 학교 공부, 방과 후 교실, 체험학습, 주변 친구의 문제 등 일기에 쓸 만한 일은 대부분 학교에서 벌어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집에서 일기를 쓰고, 학교에서 담임선생님의 검사를 맡도록 하니, 아이들은 관성적으로 집에서 있었던 일을 쓰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밥을 먹고, 숙제를 하고, 가족들과 놀고, 잠을 자는 늘 반복되는 일상을 일기장에 쓸 수는 없으니 결국 쓸 말이 없었다는 것이다.
"어떤 아이는 일요일에 가족들과 야외로 놀러갔다가 돌아와 저녁에 영화를 보면, 야외놀이 갔던 일은 일요일 일기로, 영화 본 것은 월요일 일기로 나눠서 쓰기도 합니다. 일기를 위한 일기가 돼 버리는 것이죠."
◇하루 일과를 생생히 담아
학교에서 쓰는 '학교일기'에는 아이들의 생생한 하루가 담겨있다. 일기를 쓰기 전에 김견숙 담임교사는 1교시부터 마칠 때까지 오늘 하루 있었던 일, 배웠던 과정을 간단하게 정리해줌으로써 아이들이 쉽게 이야깃거리 찾을 수 있도록 도와준다. 물론 '꾸중 들은 아이는 꾸중 들은 이야기를, 준비물을 갖고 오지 않은 아이는 준비물 이야기를 쓰도록' 지도한다.
'상호랑 놀다가 손가락을 다쳐서 너무 아팠다. 담임선생님께 말씀드렸더니 보건실로 데려가 주셨다. 약을 바르고 밴드도 발랐다.'
'친구 ○○가 쉬는 시간마다 우리를 쫓아다녀서 '몸치탈출운동'을 못했다.'
아이들은 일기에 꼭 자기 이야기만 쓰지는 않는다. 친구에 대한 이야기, 선생님에 대한 이야기도 쓴다. 자신은 차마 밝히기 꺼리는 문제도 친구가 일기를 통해 밝히니 학생 지도에도 도움이 된다.
◇학부모의 관심 부쩍 늘어
아이들이 이른바 '학교일기'를 쓰기 시작하자 무엇보다 학부모들의 관심이 높아졌다. 아이가 말하지 않는 이상 학교 생활을 구체적으로 알 길이 없었던 부모들은 일기를 통해 자녀의 학교 생활을 잘 알 수 있게 된 것이다. '학교일기'를 본 학부모들은 이렇게 이야기를 덧붙인다.
'우리 보윤이 봄노래를 배웠구나. 보윤이가 부르는 봄노래를 들어보고 싶다.'-최보윤양 어머니-
'아빠랑 열심히 연습한 보람이 있었네.'-손효승군 아버지-
'휴대폰 잘 써야 한다. 현명한 우리 소영이가 되기를!'-박소영양 어머니-
아이의 '학교일기'를 통해 학부모는 아이의 학교 생활을 파악하고, 선생님과 따로 전화통화를 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의견을 주고받을 수 있다. 학부모들은 아이의 독특한 특징을 이야기하며, 선생님의 이해와 지도를 부탁하기도 한다.
학생일기를 부모나 교사가 일일이 확인하는 것은 인권침해가 아닐까. 실제로 그런 논란이 벌어진 적도 있었다. 그러나 대구 매곡초교 신호성 교장은 "초등학생의 일기는 인권침해 차원이 아니라 생활지도 차원에서 봐야 한다. 아직 분별력이 떨어지는 어린 나이인 만큼 지도하는 이점이 훨씬 크다. 학부모와 교사가 아이들의 일기만 꼼꼼히 살펴봐도 많은 문제를 예방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제는 쓰는 게 즐거워"
학교에서 함께 일기를 쓰니 글쓰기에도 도움이 된다. 집에서 혼자 쓸 때라면 아무렇게나 서너 줄 쓰고 말 것도, 정해진 시간 동안 급우들과 함께 쓰니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되고, 표현력도 기를 수 있는 것이다. 집에서 써올 때보다 일기의 분량도 훨씬 늘어났다. 아이들은 재미있는 일기를 썼다며 서로 자랑하기도 한다. 억지로 일기를 쓰느라 쓰기 자체를 싫어하던 아이들이 이제는 쓰기를 좋아하게 됐다는 점도 장점이다.
학부모 이남선씨는 "아이가 잠자리에 들기 전에 일기 쓸 거리로 고민하는 모습이 안쓰러워 온 가족이 동원돼 일부러 이야기를 만들어주는 촌극도 종종 벌어진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는 만큼 학교 일기를 쓰는 편이 글쓰기 재미 붙이기에도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조두진기자 earfu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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