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살아가는 이야기] 봄이 오는 소리Ⅱ

세월 흘러 나이 들어도, 마음 속의 봄은 그대론걸…

♥ 봄날 더욱 설레는 할머니 모임

변덕스런 봄 날씨로 우울해 하고 있던 차에 오랜만에 화창한 날, 고등학교 친구 모임이 있어 나가게 되었다. 2년 후면 칠순을 맞이하는 할머니들의 모임이지만 두 달 만의 만남이라 설레는 마음으로 미장원에 들러 머리도 손질하고 카키색 원피스를 챙겨 입었다. 예쁜 코사지도 하나 살짝 꽂고 얼마 전 생일날 선물로 받은 알록달록 꽃무늬 머플러로 외출 준비를 마치고 모임 장소로 향했다.

우리끼린 늘 젊었고 그 학창시절 모습 그대로인 듯 착각 속에서 행복해했다. 13명 중 2명만 결석이니 출석률이 90% 이상이다. 오늘따라 샛노란 개나리색 머플러로 멋을 낸 친구, 연분홍 연하늘빛 옷에 예쁜 목걸이를 한 친구, 반짝반짝 빛나는 귀걸이를 한 친구 등 다들 환한 얼굴에 방 안 가득 이미 봄이 와 있었다. 겨울의 긴 터널에서 빠져나온 통쾌함에서인지 목소리들도 한 옥타브 올라간 소프라노가 되었고 봄은 여인들의 옷에서 온다고 한 이야기가 실감이 났다.

친구들아! 우리 함께 풀꽃들의 순환과 질서의 조화, 그런 아름다운 자연의 넓은 사랑을 가슴에 품고 봄이 오는 소리에 귀 기울여 보자꾸나.

박명숙(대구 동구 신서동)

♥ 봄비 그치면 시린날도 끝나겠지

아침나절 느지막이 눈을 뜨니 창밖에선 소리 없는 봄비가 내린다. 그 너머엔 나뭇잎에 맺힌 물방울이 햇살을 받아 아롱져 반짝이고 또 그 너머엔 세수한 산과 들이 기지개를 켠다. 젊은 날 무심의 슬픔인지 싸하게 심연 속으로 빠져들다 창틀에 튄 물방울에 다시 나를 추스른다. 끝없이 내릴 것 같은 봄비에 지난 일들이 떠오른다. 기쁨이란 얼마 지나지 않아 내성이 생겨 금방 무뎌지지만 슬픔이란 긴 꼬리를 만들며 여운이 남는다.

담담하게 맞고 가는 이, 가릴 것이 없어서 그대로 젖어버린 이, 얼마나 아프든 어떻게 아프든 어쩔 수 없다. 멀리서 보는 나도 싸하게 시린데 그저 맞고 있을 뿐이다. 봄비가 그치면 높고 푸른 하늘엔 풍성한 구름양떼가 몰려오겠지.

허이주(대구 달서구 용산2동)

♥ 감천 방천 개나리꽃 '봄 전령사'

자연 속에 묻혀 살면서 봄이 오는 소리를 어찌 개나리 필 무렵에만 느낄까마는 나는 유별나게 해마다 봄이 오는 것을 감천 방천의 개나리꽃을 보고 느끼게 된다.

내가 살고 있는 김천에는 감천이라는 고을이 있고 김천시민의 수돗물과 농업용수를 해결해 주는 감천이라는 샛강이 있다. 물길을 따라 쌓아놓은 방천은 그저 방천 역할만 하는 것이 아니다. 약 4㎞에 해당하는 길을 따라 심어놓은 개나리꽃은 누가 봐도 탄성을 자아낸다. 동서남북 지천에 깔려있는 봄의 전령사들이 그렇게도 많지만 내 마음을 더욱더 간질이는 것이 바로 감천 방천의 개나리꽃이다.

나는 김천에서 10여 년 동안 살면서 감천 방천의 개나리꽃이 너무도 마음을 행복하게 만들어 주기에 해마다 연례행사처럼 찾아가서 새봄을 맞이한다. 길게 늘어선 개나리꽃을 사랑하는 옥주를 승용차 옆자리에 태워 드라이브를 하노라면 이 세상 어디에 이만한 행복놀이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무아지경에 빠진다. 그런데 작년부터 건강이 좋지 못하여 운전대를 잡지 못해 그곳에 갈 수가 없게 되었다. 필경 금년에도 감천 방천의 개나리꽃은 봄 소식을 전하러 왔을 터인데 나는 마중을 하러 가지 못해서 궁금하기도 하고 섭섭하기도 하다. 나이가 칠십 줄에 접어들어 건강도 예전 같지 못하니 집에 앉아서 봄이 오는 소리를 들어야 할까 보다. 혹시 내년에는 가 볼 수가 있을지….

이종근(김천시 황금동)

♥ 톡톡 가루분 바르고 나물캐던 엄마

'톡 톡 톡…' 향긋한 코티 가루분을 얼굴에 조심스럽게 바르시던 엄마. 화장을 한 듯 안 한 듯 그렇게 마무리하신 엄마는 어린 딸 손을 잡고 봄 들녘으로 나가셨다.

따뜻함이 충만한 봄 햇살을 등에 업고 여기저기 얼굴을 내민 냉이를 깊은 호미질로 튼실하고 긴 하얀 뿌리까지 캐시던 엄마. 자잘한 잎들이 마주보게 나있는 냉이를 보여주면서 "요렇게 생겨 먹은 놈으로 뽑아라 "고 하셨고 냉이 하나를 표본으로 똑같이 생긴 나물을 하나 둘 캐내어 바구니에 넣곤 했다.

엄마의 부지런한 손길 덕분으로, 아님 이 풀 저 풀 마구 뜯어 넣은 나의 장난기로 바구니 안에는 냉이와 푸성귀로 가득 찼다.

양지바른 시냇가에서 냉이를 깨끗하게 다듬고 씻고 아직은 차가움이 온몸으로 저려오는 시냇물로 흙먼지 묻은 나의 손도 깨끗이 씻고 집으로 왔다. 잠시 후에 학교를 파하고 돌아올 언니를 위해, 맛있는 점심상을 차려주기 위해 엄마 혼자만의 보물금고인 찬장을 부지런히 열고 닫으셨고 찬장 속에서 꺼내신 보물은 하얀 밀가루와 식용유였다.

그 시절, 그렇게 귀하게 여긴 식용유를 프라이팬에 자작하게 붓고 준비한 냉이에 밀가루 반죽을 입혀 지글지글 기름에 튀겨 내셨다. 금방 튀긴 냉이 튀김을 '호호' 불어가며 한입 물어 먹으면 입안에서 바삭바삭하게 부서지는 냉이 잎의 향기와 고소한 맛은 그 당시 최고의 간식거리인 뽀빠이 스낵만큼이나 훌륭했다.

지난 주말에는 그 옛날 내 엄마의 모습이 되어보고 싶어 화장대 서랍 저 안쪽에 밀어 넣어둔 콤팩트를 꺼내어 '톡 톡 톡' 얼굴에 조심스레 바르고 호미를 챙겨서 엄마께 전화를 내었다.

"엄마 팔공산 미대마을에 냉이 캐러가요. 많이 캐서 옛날에 엄마가 우리들에게 해주시던 냉이 튀김 해드릴게"라는 말에 "냉이, 다리도 아프고 눈도 많이 침침해져서 냉이 못 찾아 못 캔다. 니나 많이 캐서 나 한줌 주고 가라. 된장찌개에 한두 뿌리 넣어서 묵게"라고 하셨다. 엄마 대신으로 남편과 딸을 앞세워 미대마을로 봄 마중을 나섰다. 내가 그랬듯 우리 딸 또한 냉이가 아닌 다른 푸성귀를 캐서 바구니에 마구 집어넣는 바람에 바구니에는 금세 봄이 한가득 들어차 있었다.

버들피리 꺾어 부는 소리, 새들 지저귀는 소리, 졸졸졸 시냇물 흐르는 소리들은 이제 우리 곁에 봄이 와 있음을 알려주는 파수꾼들이다. 나는 그 파수꾼들 속에 '톡 톡 톡' 엄마들의 분화장하는 소리를 넣어보고 싶다. 봄은 여자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는 말 때문일까? 아님 톡 톡 톡 손대면 금방이라도 터질듯한 꽃망울 때문일까? '톡 톡 톡' 봄이 오는 소리가 들린다.

김현숙(대구 북구 대현1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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