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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춘추] 촌지와 찬조금

김일부
김일부

스승에 대한 감사의 표시인 촌지의 유래를 언젠가 은사 선생님께서 들려주신 적이 있다. 옛날 '글하는 사람'이 드문 시절, 사정이 어려운 동네 아이들을 모아놓고 글을 깨우쳐 주었다. 부모들은 감사의 표시로 가을 소작의 소출로 형편껏 답례를 했다. 못다한 몫은 존경심으로 채웠다. 그 지극함이 담긴 답례가 촌지라 하셨다. 덤이 아니라 부족함을 대신했다. 찬조는 학교의 틀이 갖춰진 이래 빈약한 국가 교육재정의 자투리를 조금이나마 메웠다.

한 세대 전만 하더라도 교직은 교육 그 자체였다. 달리 말해 지금의 공교육과 사교육의 역할을 대부분 책임졌다. 제자들에게 아낌없이 베푸는 보람에 박봉을 견디며 살아낸 삶이었다. 그런데 국가나 가정 살림이 나아진 이 시점에 교직은 어느 분야보다 쏠쏠한 혜택(?)을 누린다는 이야기가 여전하다. 촌지와 찬조를 통해서.

최근에 불거진 서울 어느 특목고의 불법 찬조금 사건은 빙산의 일각일까? 촌지나 찬조금이 문제인 것은 비단 학부모들로서 부담이 되네 안 되네 하는 게 아니다. 강제성이 있었네 없었네 하는 데에 국한되는 것도 아니다. 학교가 교육 일정을 꾸리면서 가외로 학부모들의 성의를 불러들인다는 점이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아이가 전교 회장단에 선출되었다든가', '원하던 상급학교에 진학했다느니', '옆 학교는 담임들에게 여행을 시켜준다더라'하는 식의 공식을 불문율로 만들어 놓았다. 구시대의 결혼 지참금이 오늘에 이르러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는데 필요한 재학 지참금으로 부활한 듯하다.

요즘 교직 사회를 보면 한 세대 전의 교사들이 소중히 간직해온 자부심을 딛고 다음 세대 교사들이 가져야할 명예를 가불하여 현재를 위해 스승을 향한 존경과 감사의 곳간을 비우고 있는 건 아닌지 염려스럽다. 어쩌면 후일 역사가들은 오늘날의 교직을 평하며 스승의 은혜를 상품화한 세대로 낙인찍을 지도 모를 일이다.

통계에 의하면 우리나라의 교직에 대한 대우가 OECD국가 중 높은 편에 속한다. 그 사실에 가타부타 토를 달 학부모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다만 촌지, 찬조 따위의 음성적인 납부금에 대해서는 반길 리 없다. 어차피 자식 맡긴 죄 값인데 영수증 발급을 제도화하자는 볼멘소리도 들린다.

사회가 어떻게 변하든 기준은 있어야 한다.그 기준의 한가운데에 성직 다음으로 교직이 자리해야 건강한 사회다. 개혁이 불가항력일 때 어김없이 혁명은 찾아왔고, 도덕과 질서가 무너질 때 분쟁은 반드시 일어났다. 역사의 가르침이다.

지금 우리 교육계는 찬조금을 비롯한 여러 문제들을 안고서 어디쯤 서 있을까?

김일부(교육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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