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년간 남도에서 귀양살이를 했던 다산 정약용은 아들들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썼다. "내가 밤낮으로 애태우며 돌아가고 싶어하는 것은 너희들 뼈가 점점 굳어지고 기운이 거칠어져 한두 해 더 지나 버리면 완전히 내 뜻을 저버리고 보잘것없는 생활로 빠져 버리고 말 것만 같은 초조감 때문이다." 가까이서 제대로 아이들을 가르치지 못하는 아비의 심정이 어떤지를 그대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유배(流配)형은 조선시대 다섯 가지 형벌 중 하나로 대체로 정치범에게 가해진 형벌이었다. 극형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아무런 물적, 인적 기반이 없는 곳에서 죄인 신분으로 기약 없이 살아가야 한다는 점에서 고달프기는 이루 말할 수 없었으리라. 하루하루 연명해 가는 궁핍한 생활도 그렇지만 심리적 단절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고달픔 때문에 모든 것을 자포자기하고 끝내 버린 것은 아니었다. 다산의 편지에도 보이지만 '곤궁한 괴로움이 또 그 심지를 단련시켜 지식과 생각을 툭 틔워주고 인정물태(人情物態)의 진실과 거짓된 형상을 두루 알게 해 준다'는 장점도 있었다. 숱한 유배자들이 절망에서도 자기완성을 이뤄 낸 것은 더 큰 차원으로 승화되는 체념의 힘 때문이었다. 김정희는 유배지 제주도에서 추사체를 완성했고, 다산은 500여 권이 넘는 방대한 저서 대부분을 유배지에서 완결했다.
그래서 절망이라는 이름으로 묻혀 있던 유배가 시간의 벽을 뛰어넘어 새롭게 조명되고 있는 것이다. 경남 남해군이 '서포 김만중 문학상' 제정과 유배문학관 건립 등 유배를 문화자산이자 지역관광상품으로 활용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유배인을 '귀양다리'로 부른 제주도는 광해군이나 추사, 면암 최익현 등의 유배길을 따라가는 체험 코스를 만들고, 유배를 테마로 다도해를 연결하는 크루즈 관광상품 개발 계획까지 내놓았다.
최근 1심에서 무죄 선고를 받은 한명숙 전 총리에 대해 검찰이 정치자금법 위반 수사 카드를 꺼내들자 민주당은 정치 보복이라며 지방선거 이후로 미뤄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말하자면 '정신적 유배'에 대한 반발인 것이다. 대개 유배형이 정치권력의 변동에서 기인하듯 한 전 총리의 수사에서 공교롭게도 많은 이들이 유배의 그림자를 읽어 내려는 것도 명예나 관계와의 단절이 주는 고통이 얼마나 큰지 어렴풋하게나마 알기 때문은 아닐까.
서종철 논설위원 kyo425@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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