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 은행세

은행은 하나같이 근사한 건물을 사용한다. 전자결제제도가 발달한 오늘날에는 굳이 은행에 가지 않아도 거래를 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크고 화려한 건물은 낭비다. 그런데도 그렇게 한다. 왜일까? 초창기 은행이 그렇게 했기 때문이다.

은행이 정부의 감독을 받지 않았던 시절 은행의 도산은 흔한 일이었다. 그럴 경우 예금자는 대부분 생돈을 떼였다. 그래서 어느 은행이 위험하다는 낌새만 있어도 고객들은 예금을 찾으러 은행으로 달려갔다. '뱅크런'(bank-run)이란 말은 여기서 나왔다. 1897년과 1907년 두 차례의 뱅크런을 경험한 미국은 사태의 재발을 막기 위해 1913년 연방준비제도를 마련했지만 이후 1930년과 1931년, 1933년 세 차례나 더 뱅크런이 발생했다. 굳게 닫힌 은행 문 앞에 예금자들이 꼬리를 물고 늘어서 있는 모습은 당시에 낯설지 않은 풍경이었다. 이러다 보니 예금자로서는 자신들의 예금을 은행이 몽땅 싸갖고 야반도주하지 않을 것이란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은행은 이들을 안심시켜야 했다. 이를 위해 은행은 육중한 대리석 건물에 들어앉았다. "돈을 챙겨 도망갈 사기꾼이라면 무엇 때문에 은행을 비싼 대리석과 청동으로 치장하겠습니까? 우리는 절대 망하지 않습니다"는 일종의 선전이었다.

오늘날 은행은 잘 망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이유는 화려하고 비싼 건물 때문이 아니라 정부가 공적자금으로 도산을 막아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브레이크 없는 외형 확장, 무모한 투자와 차입으로 위기를 자초해도 걱정할 것은 없다. 돈 잔치도 빼먹지 않는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 미국의 금융기관들은 천문학적 액수의 구제금융을 수혈받고도 거액의 보너스 파티를 열었다. 국내 은행도 다를 바 없다. 외환위기 이후 정부가 금융기관에 투입한 공적자금은 160조 원이 넘는다. 이 중 회수한 돈은 96조 원에 불과하다. 공적자금으로 연명하는 처지이면서도 임직원의 연봉은 입을 딱 벌리게 한다.

다음주 미국 워싱턴에서 열리는 주요 20개국(G20) 재무장관 회의에서 '은행세' 도입이 본격 논의될 것이라고 한다. 은행세란 금융위기에 대비한 비용 마련을 위해 은행에서 거둬들이는 돈이다. 은행 잘못으로 인한 위기는 국민에게 기대지 말고 스스로 해결하라는 것이다. 옳은 얘기다. 거액 연봉을 받으면서도 걸핏하면 국민에게 손을 내미는 은행의 못된 버릇은 반드시 없어져야 한다.

정경훈 논설위원 jghun316@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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