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신남희의 즐거운 책읽기] 사랑은 지독한(그러나 너무나 정상적인)혼란

흥미로운 사례·인용구·기발한 표현 가득

현대의 삶 속에는 갖가지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녹아내리는 북극 얼음으로 살 곳을 잃어버리고 죽어가는 북극곰, 오염된 밥상, 언제 해고당할지 모르는 불안, 끝없는 경쟁이 지배하는 시대. 세계 최고의 자살률과 세계 최저의 출산율을 기록하는 불안과 불임의 시대. 이러한 시대에 사랑이라고 무사할 리 없다. 결혼에 관심 없고 결혼을 하지 않으려고 하는 초식남, 건어물녀가 신조어로 등장한 지 오래이고, 결혼하지 않는 자식들 때문에 속 썩는 노인들이 적지 않다. 이혼은 결혼식의 하객이 되어 버렸고, 부모 노릇이 조립식 블록처럼 이루어질 날도 머지않았다. 사랑과 결혼의 위기라고 불러도 좋을 현상들이 우리 사회에 폭넓게 확산되고 있다.

독일의 사회학자이며 『위험 사회』의 저자이자 떠오르는 유럽 좌파 정치이론가의 한 사람인 울리히 벡과 유명 저널리스트인 엘리자베트 벡-게른샤임은 이 책에서 현대 사회의 보편적 특징이라 할 만한 사랑의 위기에 대해 말하고 있다. '사랑'과 '위험'이라는 사뭇 어울리지 않는 이 조합은 벡의 '위험' 개념에 따르면 현대사회에서 사랑이 차지하고 있는 위상과 처음부터 긴밀하게 연결돼 있었다. 벡이 말하는 위험은 반드시 밖으로부터의 침입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위험(risk)의 반대말은 안전(security)이다. 근대의 등장으로 개인은 미리 정해진 신분에 따르는 운명이나 전통, 또는 자연적 제약으로부터 자유로워졌지만 이 자유는 또한 불확실성, 타협, 여러 선택지들 앞에 속수무책으로 내던져질 자유이기도 했다. 봉건으로부터의 해방은 개인에게 성찰성의 세계를 열어주었지만 동시에 안전감의 토대인 확실성의 뿌리를 제거해버리는 결과를 빚었다.

현대인은 집단에의 소속도, 전통도 떨쳐낸 오롯한 '나'로서 이러한 불확실성의 세계를 항해하도록 요구받는다. 그러한 그/그녀에게 사랑은 자신을 정박시킬 수 있는 마지막 희망이다. 신분, 계급, 직장, 국적, 그 어느 것도 진정한 '나'를 보증해 주지 못하는 것으로 판명날 때, 사랑은 나의 존재의 의미와 진정한 자아를 확인시켜 줄 최후의 보루이다. 그 사랑에 실패할 때, 그 사랑이 나를 배신할 때, 그것은 나의 안전을 뿌리부터 흔들어 놓는다.

눈에 보이는 재난만이 위험이 아니다. 우리를 가장 상처입히는 것은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대상이다. 가장 사랑하기 때문에, 가장 가깝기 때문에, 심지어 우리 자신의 일부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상처받고도 쉽사리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다.

이 책에서 저자들은 '사랑'에 거는 현대인의 높은 희망을 분석하면서, 사랑을 그 어떤 추상적 가치나 화려한 수사로 환원하기를 거부한다. 대신 실제로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가는 삶의 실제적 과정을 추적한다. 저자들은 근대성의 근간을 이루는 산업사회의 구조를 들여다보고 산업 사회의 노동시장이 개인에게 요구하는 명령들을 살펴보면서 남녀 사이의 사랑에 작동하는 구조적 힘들을 밝혀낸다. 가정으로부터 분리된 일터에서 하루의 대부분을 보낼 것, 공적 노동을 엄격하게 사생활과 분리할 것, 노동시장의 요구에 맞추어 이동성을 갖출 것 등. 산업 사회의 노동시장은 이렇게 모든 가족관계, 인간관계로부터 자유로운 오롯한 '개인'을 요구한다. 그렇다면 그의 가족은 어떠한가? 그녀의 삶의 의미는 어떻게 얻어지는가?

대중적인 호소력과 유려한 문체로 유명한 벡 부부답게 이 책에는 흥미로운 사례와 인용구, 기발한 표현이 가득 차 있다. 현대사회에 대한 진지한 사회학 저술로 읽을 수도 있고, 막 사랑을 시작하려는 사람들을 위한 지침서로도, 아이를 낳고 양육하는 부모들에게 부모 노릇의 깊이와 어려움을 가르쳐주는 교과서로도 읽힐수 있다.

(새벗도서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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