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나물은 서서 자란다. 외다리 깨금발의 발돋움 명수들이다. 간혹 누워서 크는 놈들도 있다. 그런 놈들은 그 세계에서도 크게 대접받지 못하고 '돌림 빵'신세를 면치 못했을 것 같다. 인간 세상도 마찬가지다. 콩나물이 그렇듯 사람도 서거나 앉거나 때론 누워서라도 모두가 일하며 살고 있다. 그런데 누워 크는 콩나물처럼 놀고먹는 사람은 인간 취급을 받지 못한다. 뒤통수에다 대고 '누워 크는 콩나물 같은 놈'이란 손가락질을 받는다.
고향 동네에 '푼실이 아바이'라는 사람이 몇 집 건너에 살고 있었다. 그는 평생 돈 벌어 본 적이 없고 허리 휘게 일해 본 적도 없는 사람이다. 그야말로 누워 크는 콩나물과 같은 분이다.
그는 낮일은 없었지만 밤이 몹시 바빴던 사람이다. 그 집에는 아이가 많았다. 일하지 않아도 쫓겨나는 일은 없었다.
콩나물은 꽃을 피우지 못한다. 그래도 노래는 썩 잘 부른다. 밤이고 낮이고 노파가 흔드는 바가지처럼 생긴 지휘봉에 맞춰 춤을 춘다. 노란 맨대가리를 덮고 있는 검은 커튼이 열리면 잎도 꽃도 없는 4분 음표들이 코러스 단원이 되어 시루가 비좁도록 높은 음을 토해낸다. 그들의 목표는 외발을 뻗어 몸을 수직으로 상승시키는 것이다.
#완전 누드 베레모 하나로 부끄러움 가려
시인 정채봉의 '콩씨네 자녀 교육'이란 시가 있다. "광야로 내보낸 자식은 콩나무가 되었고 온실로 들여보낸 자식은 콩나물이 되었고" 이 시 한 편이 대통령이나 교육담당 장관의 "사교육과 학원 과외를 없애겠다"는 현실성 없는 발언보다 훨씬 가슴 찌릿한 감동을 느끼게 한다.
콩나물은 시루를 벗어날 땐 완전 누드에 베레모 하나만 덮어쓰고 부끄러움을 가리고 슬픔을 덮는다. 법정 스님이 입은 옷 그대로 대나무 평상 위에 얹혀 다비되듯 콩나물은 모든 격식이 생략된 채 모자를 벗고 발톱만 깎인 채 뜨거운 솥에서 열반에 든다. 스님들의 몸에선 더러 사리가 나와 부도에 봉안되기도 한다. 그러나 열반에 든 콩나물은 부도탑 같이 생긴 뚝배기에 담겨 국도 되고 탕도 되어 공양 상에 오르지만 사리 같은 건 나오지 않는다. 부도 앞에 선 불자들은 "마하바라 밀다심" 하고 염불을 외고 이른 아침 뜨거운 콩나물국 앞에 앉은 모주꾼들은 "어 시원하다"는 찬사를 바친다.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사람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사람은 콩나물을 키우는 사람이다. 그들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가 아무 소용없는 짓이 아니라는 실체적 진실을 콩나물시루로 증명한 사람이다. 내 외할머니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 무남독녀 딸 하나만 낳고 첩에게 남편을 빼앗긴 외할머니는 어릴 적부터 나와 콩나물을 함께 키웠다.
오막살이 고향집은 방이 두 개밖에 없었다. 큰 방은 어머니와 딸 셋의 공간이었고 작은 방은 외할머니와 아들 둘의 전용 거처였다. 작은 방 북쪽 시렁 밑에서 여름 한철을 뺀 나머지 기간 동안 콩나물을 키웠다. 한밤중에 일어난 외할머니는 요강에 오줌을 누면서 시루에 물을 끼얹었다. 우리집 콩나물은 오줌 누는 소리만 들려도 깜빡 잠에서 깨어나 '아하, 물을 주는구나' 하고 물 맞을 준비를 아마 했겠지.
#콩나물 횟집 한 옹가지 지고 오던…
어느 봄날 큰누나가 시집가는 날이었다. 우물가에선 돼지 멱 따는 소리로 시끌벅적했고 마당가에는 조선 솥뚜껑을 뒤집어 부침개를 부치는 연기가 하늘로 올라갔다. 먹을 것이 너무 많아 행복했다. 준비가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앞서 이야기한 누워서 크는 콩나물 같은 푼실이 아바이가 지게에 무엇을 지고 사립문을 들어섰다.
지게 위에는 콩나물 횟집이 한 옹가지 가득 얹혀 있었다. 콩나물 횟집은 삶은 콩나물을 콩가루에 묻혀 간을 한 시골 음식이다. 찹쌀밥을 콩가루로 주물러내면 찰떡이 되듯 콩가루를 듬뿍 묻힌 횟집도 맛이 아주 좋았다. 그날 이후 콩나물 횟집을 먹어 본 적이 없지만 콩나물만 눈에 뜨여도 푼실이 아바이 얼굴이 선연하게 떠오른다.
구활(수필가 9hwa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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