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國恥百年](16)일제의 언론통제와 언론 자유 말살

'신문지법' 만들어 1910년 총독부기관지 외 모두 폐간

일제 언론 탄압의 주범은 조선 총독부였고 1940년에 이르러 언론의 자유는 완전히 말살됐다. 이런 가운데서도 전국의 신문과 잡지 기자들은 전조선기자대회를 여는 등 조직적으로 저항했다.
일제 언론 탄압의 주범은 조선 총독부였고 1940년에 이르러 언론의 자유는 완전히 말살됐다. 이런 가운데서도 전국의 신문과 잡지 기자들은 전조선기자대회를 여는 등 조직적으로 저항했다.
1923년 1월에 열린 잡지 신생활의 필화사건 공판. 결국 신생활은 일제의 탄압으로 폐간됐다.
1923년 1월에 열린 잡지 신생활의 필화사건 공판. 결국 신생활은 일제의 탄압으로 폐간됐다.
박찬승 한양대 사학과 교수
박찬승 한양대 사학과 교수

독일의 유명한 철학자이자 사회학자인 위르겐 하버마스는 근대 사회에서 인간의 해방은 인간들 사이의 원활한 의사소통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고 했다. 원활한 의사소통을 위해서는 일정한 '공론의 장'이 필요하고 이러한 공론의 장은 집회와 결사의 자유, 언론의 자유(표현과 출판의 자유)를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고 보았다.

언론의 자유는 근대 사회에서 필수적인 것이라 할 수 있지만 일제 식민지 하에서 언론의 자유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1906년 한국에 통감으로 온 이토 히로부미는 통감부 기관지로 경성일보를 만들었고 영자신문 서울 프레스도 만들었다. 1907년에는 '신문지법'을 만들어 당시 반일 언론의 성격을 띠고 있던 대한매일신보와 황성신문 등 한국인들이 발행하고 있던 신문을 본격 통제하기 시작했다.

1910년 일제는 한국을 병합한 뒤 한국인들이 발행하던 위의 두 신문을 비롯, 제국신문 등 모든 신문을 폐간시켰고 각종 사회단체와 학회에서 발행하던 잡지도 모두 폐간시켜 버렸다. 그리고 대한매일신보를 매수해 매일신보라는 총독부 기관지를 발행하기 시작했다.

1910년대 한글 신문은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 하나만 남게 된 것이다. 이 신문은 "조선 민족은 문명한 법률 하에서 생명과 재산을 보호받고 총독이 선정을 베풀어서 지식과 권리를 획득하게 되었다"고 총독 정치를 선전했다. 또 조선은 "과거에 독립을 유지해온 역사도 없고 현재도 독립할 능력이 없다"면서 일본에 동화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총독부는 일본인들이 발행하던 일본어로 된 신문 가운데에서도 경성일보만을 남기고 모두 폐간시켜 이 신문을 총독부 기관지로 활용했다.

이처럼 1910년대는 언론 자유가 완전히 폐색된 시기였다. 그 결과는 1919년 3·1운동기에 뿌려진 각종 지하 신문들로 나타났다. 조선독립신문을 비롯하여 자유보, 각성회보 등 각종 지하 신문들이 발행돼 만세 운동의 소식을 전했다. 3·1운동 이후 새로 부임한 사이토 총독은 이른바 '문화정치'를 표방하면서 한국인들의 동아일보, 조선일보, 시대일보 등의 발간을 허용했다. 잡지의 발간도 부분적으로 허용했지만 이들 신문·잡지는 1907년의 신문지법과 1909년의 출판법의 통제 하에 놓여 있었다.

일제의 언론 통제는 '검열'부터 이뤄졌다. 신문지법에 의해 허가된 3개 신문과 일부 잡지들은 발행 즉시 2부를 납본하도록 하고 이를 검토한 뒤 문제가 있다고 판단되면 압수·발매 금지·발행 정지 등의 처분을 내렸다. 또 출판법에 의해 발행되는 대부분의 잡지들과 단행본들은 사전에 원고를 제출해 검열을 받도록 했다.

검열 조치 외에도 총독부는 보다 극단적인 조치로 신문·잡지에 대해 발행 금지, 즉 폐간 조치를 내리기도 했다. 1920년대 잡지 '신생활'과 '개벽'이 그러했다. 당시 경무국 고등경찰과는 이들 잡지가 사회주의를 선전하는 등 치안을 방해했다 해서 폐간 조치를 내렸다. 1920년대 '잡지의 제왕'이라고 불린 개벽은 시사 문제와 교양 기사를 주로 다뤘는데 창간 이래 발매 금지 34회, 정간 1회, 벌금 1회 등 가시밭길을 걸은 끝에 1926년 8월 72호로 결국 발행금지 조치를 당하고 말았다.

동아일보도 4차례에 걸친 정간으로 총 1년 6개월 동안 신문을 발행하지 못했고 조선일보는 4차례 정간으로 총 8개월 동안 신문을 내지 못했다. 1920년부터 1940년까지 동아일보가 총 437회, 조선일보가 471회의 압수 처분을 당했다. 시대일보, 중외일보, 조선중앙일보도 299회에 달했다.

장기간의 정간 조치는 신문사와 잡지사에는 치명적인 것이었다. 조선중앙일보는 1937년 손기정 선수 일장기 말소 사건으로 장기간 정간 조치를 당한 뒤 정간이 해제된 뒤에도 재정난으로 신문을 발행하지 못했다.

발매 금지·정간·폐간과 같은 극단적 조치 외에도 총독부 경찰은 수시로 주의·경고·금지 등의 일상적 조치를 통해 언론을 계속 통제했다. 이러한 통제 정책은 언론을 순치시키는 데에 상당한 효과가 있었다.

1930년대 들어서면서 각 신문과 잡지의 논조는 크게 무뎌졌고 스스로 자기검열을 하는 등 점차 식민지 언론 환경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잡지의 종류가 늘면서 대중적인 기호에 영합하는 흥미 위주의 대중잡지도 등장하였고 시사 잡지들도 점차 기사가 연성화되면서 대중잡지를 따라가는 경향을 보였다.

1930년대 중반, 특히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 말소 사건 이후 일부 신문과 잡지들은 친일화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1930년대 초까지만 해도 소극적인 저항을 하던 신문들은 손기정 선수의 사건을 계기로 총독부의 강력한 탄압을 받은 뒤 무력화되었던 것이다. 어떤 신문은 1면에 일왕 사진을 게재했고, 어떤 잡지들은 총독의 유시, 총독부의 주요 법령 등을 잡지의 첫 머리에 다루고 있었다.

1937년 중·일 전쟁이 발발한 뒤 총독부는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에 강력한 압력을 넣었다. 총독부 경무국은 각 신문사 대표들을 불러 시국에 협조하도록 요구했고 이후에도 이러한 압력은 계속됐다. 결국 두 신문의 논조는 변화하기 시작, 점차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와 비슷하게 되어 갔다.

하지만 총독부 경무국은 이 정도에도 만족하지 않았다. 1939년부터 총독부는 두 신문의 폐간이 불가피하다고 보고 1940년 결국 두 신문을 강제로 폐간시켰다. 이로써 식민지 조선에서의 언론 자유는 완전히 말살되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와 같은 언론 탄압 하에서도 언론인들의 저항은 끊이지 않았다. 신문·잡지 기자들은 무명회·철필구락부·전위기자동맹과 각 지역의 기자단을 조직했고 언론집회압박탄핵대회·전조선기자대회와 각 지역별 기자대회를 열어 언론 탄압에 조직적으로 대응했다. 하지만 집회와 결사의 자유도 제한돼 있어 저항 역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박찬승 한양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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