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은 오는 둥 마는 둥 변덕을 부리다가 채 봄빛을 반길 여유도, 기억할 틈도 주지 않고 문득 사라지고는 한다. 사람들은 겨울을 예감하는 스산한 가을 저녁에야 비로소 목이 메고는 한다. 마냥 늑장을 부린 봄날에 온갖 푸념을 늘어놓느라, 혹은 덧없이 사그라져버린 봄빛에 마냥 허둥지둥거리던 날들의 풍경을 떠올리면서. 봄은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열심히 피워내는 것이라는 걸, 그제야 깨닫고는 한다. 봄 햇살에 대한 애틋한 추억 하나 없이 맞이해야 하는 겨울바람에 지레 몸서리치면서 말이다.
영화 '황금 연못'(On Golden Pond, 1981)은 황혼녘의 노부부가 그려내는 달콤씁쓸한 풍경화다.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왔노라고 서로를 되돌아보지만 자꾸만 헛헛해진다. 오랜 세월 서로 간의 불화로 이제는 몸과 마음이 함께 멀어지고 닫혀버린 외동딸이 찾아오면서, 쓸쓸하도록 잔잔했던 연못이 술렁이기 시작한다. 그토록 사랑했었는데, 이토록 사랑하고자 용을 쓰고 있는데도 그 속마음을 알아주지 못하는 딸내미가 못내 서운하다 못해 두렵기조차 하다. 힘겹게 뱉어내는 말은 마음과 달리 자꾸만 어긋나고, 도리어 상대에게 상처를 주고 분노만 키워간다. 쩔쩔매고 있는 스스로의 꼴이 딱하기도 하고 불쑥불쑥 화가 치밀어 오르기도 한다.
딸아이가 여행을 떠나면서 맡겨둔 낯선 소년과 또 다른 전쟁을 치르면서 비로소 깨닫는다. 너무나 일방적으로 스스로의 방식만을 고집해왔었다는 사실을. 그것이 긴 세월 동안 나보다 더 나를 이해해주는 아내와는 달리 딸아이에게는 무척이나 힘들고도 고통스러운 시간이었음을. 우선은 되바라지고 유치하기 그지없는 어린 녀석의 말투부터 따라하면서, 함께 우스꽝스러운 악동이 되어 어깨동무로부터 시작한다. 참 신통방통한 일이다. 막무가내 도리질하면서 뒷걸음질로 뻗대던 녀석이 먼저 다가와 안겨온다.
그 광경을 지켜보면서 너무나 달라진 아버지의 모습에 순간 서러운 분노를 터뜨리던 딸은, 이윽고 발갛게 상기된 얼굴로 함께 어울린다. 한여름 눈부신 햇살 사이로 그들은 떠나고, 황금연못가에 고즈넉이 남겨진 노부부는 마주보며 속삭인다. 곧 다가올 겨울이, 이제는 그렇게 두렵지만은 않다고. 실제 주인공인 헨리 폰다의 유작이자, 부녀간의 오랜 불화설이 끊이지 않던 제인 폰다와 나누는 훈훈한 포옹으로 해서 더 긴 여운을 남겼는지도 모르겠다.
꼭 봄이 와서 꽃이 피는 건 아니다. 열심히 꽃을 피우다 보면 봄은 저절로 찾아온다고. 가버린 봄날만 서러워하기에는 이 봄날이 더더욱 짧기만 하다. 겨우내 언 땅 아래에서 남몰래 흘린 피땀 어린 노고를 몰라준다고 앙앙불락하지만 말자. 일방적으로 퍼붓는 한여름 지루한 장맛비도, 이미 말라버린 늦가을 이파리에 쏟아내는 더운 눈물도 다 허망한 도깨비놀음이기 일쑤다. 좋은 비는 좋은 때를 맞추어 내린다.
송광익<늘푸른소아청소년과의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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